부유층의 '굿바이 일본'…열도 탈출 '조짐'

‘점령(Occupy)’ 바람이 거세다. 진원지였던 미국 월가를 벗어나 유럽·아시아 각국에까지 파급되는 양상이다. 금융 위기 이후 3년이 지났건만 빈부 격차의 축소 기미가 요원하기 때문이다. 1020세대 청년 그룹을 중심으로 한 상대적 박탈감은 하늘을 찌른다.

일본도 비슷하다. 주간 다이아몬드는 최근 커버스토리로 ‘일본을 버리는 부유층’이란 심층 기사를 내보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리스크에 민감한 부유층이 최근 불거진 제반 악재 속에서 열도 탈출이란 선택에 나섰다는 얘기다. 물론 지금까지 보유한 자산을 해외에 도피시키는 부유층은 늘 있어 왔다. 해외보다 높은 일본의 상속세를 회피하려는 노림수였다. 그랬던 게 지진과 방사능 사고를 분수령으로 전환기를 맞은 분위기다. 외국인의 일본 탈출 행렬 속에 상당수의 일본 부자가 가세해서다. 이유는 ‘재팬 리스크’다. 지진·방사능·엔고·재정파탄 등의 장기적이고 주기적인 염려 때문이다. 정정 불안의 근본 이유를 대는 이도 많다. 여반장처럼 뒤집히는 정부 정책에 대한 반감과 경계가 그렇다. 정치적 불투명성이 자산 유지와 증대 환경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감세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증세로 돌아선 건 물론 궁극적으로는 재정 파탄 우려도 가시적이다.

실제 거액 부자에 정통한 금융회사엔 관련 문의가 쏟아진다. 자산과 가족을 해외에 옮기려고 거래 중인 금융회사에 루트 확보를 부탁하는 형태다. 세계 유일의 안전지대로 손꼽히는 스위스에 뭉칫돈을 옮기는 일도 흔해졌다. 일부는 아예 가족과 함께 일본을 뜨는 극단 사례도 있다. 주식과 부동산 등을 매각, 현금화해 해외 자산을 추가로 매입하는 이도 늘어나고 있다. 해외 투자 중 부동산 매입 비중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진 이후 일본인이 많이 사는 하와이 부동산 시장도 간만에 들썩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금 탈출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개인 금융자산 중 대외 증권 투자가 4분기 연속 늘어났다(자금 순환 통계). 자본 유입(엔화 유출)이다. 지진이 일어났던 1~3월(6462억 엔)에 유입 규모가 컸고 4~6월(2423억 엔)에도 흐름은 유지됐다. 대외 증권 투자는 주식·채권 등 금융자산의 해외 유출을 의미하는 지표다. 사상 초유의 엔고 상황도 한몫했다. 1달러에 70엔대라면 해외 자산을 그만큼 값싸게 살 수 있다. 전형적인 환차익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 이전인 산업 공동화 심화 배경과 똑같은 논리다. 제조 기반뿐만 아니라 가계 자산마저 엔고 날개에 올라타 일본 탈출을 가속화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일부만의 한정 이슈가 아니라 ‘국민 자산의 공동화’라고 본다.

돈만 옮겨간 게 아니다. 활동 거점을 해외로 옮기는 추세도 뚜렷해졌다. 최대 이유는 방사능 리스크를 둘러싼 공포 우려다. 정확한 오염 정보가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불신감이다. 경영 활동 중인 최고경영자(CEO)가 지진 이후 해외 진출을 보다 서두르는 게 일반적이다.

해외 거점 확보 전략은 이미 상식 수준이기 때문에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별로 없다. 자신은 남아도 가족만큼은 탈출시킨 경우도 많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캐나다·미국 등이 주요 탈출지다. 특히 싱가포르가 인기가 높다. 세금이 싼 데다 중국어·영어권이면서 2만 명 안팎의 일본인 지역사회가 구축됐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부유층 대상의 엘리트 서비스가 확충됐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의 이전 조건이 까다로워지면서 급부상했다. 저가에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다. 한국도 미약하나마 후보국 중 하나다. 재일 동포 등 국내 기반을 구축하려는 부유층이 적지 않다. 한편 여론은 최악이다. 인터넷에는 부유층의 일본 탈출을 둘러싼 비난 여론이 가득하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전 게이오대 방문교수)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834호 제공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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