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천민 진보주의

현승윤 경제부장 hyunsy@hankyung.com
5년 전 일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6년 6월30일 당·정 회의를 열었다. 재산세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내린 결정은 ‘공시가격 3억원 이하 주택은 집값이 아무리 올라도 재산세 인상률을 5% 이내로 제한하고, 공시가격 3억~6억원은 10% 이내로 억제한다’는 내용이었다. 50%로 돼 있는 재산세 상한선을 대폭 낮춘 것이다. 반면 50%였던 종합부동산세 인상률 상한선은 그해 200%로 올렸다. 6억원 이상 고가주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세부담이 전년도의 세 배로 늘어나도록 물꼬를 텄다. '편가르기 원조' 종부세 추억

싼 집이든 비싼 집이든 가격상승 이득은 모두 불로소득이다. 그런데도 당시 정부는 이분법으로 접근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은 집값의 1%를 주택보유세로 내고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고가주택 보유자’에게만 새로운 세목인 종부세를 만들어 세금을 중과했다.

종부세는 최고세율(3%)이 재산세 최저세율(0.15%)의 20배로 설계됐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들의 주택보유세는 가격에 관계없이 동일한 세율이 적용된다는 기초적인 사실은 철저히 외면했다. 당시 고가 아파트가 밀집해있는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이 많이 올라 서민들의 박탈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국가 운영의 근간인 세제를 동원해 국민을 분할 통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논의되고 있는 소득세 개정 논란도 다를 게 없다. 소득세 최고세율 신설은 ‘상위 1% 계층’에 대해서만 적용하자고 한다. 부유세 도입도 최상층 부자들만 겨냥하고 있다. 근로소득자의 40% 정도는 소득세를 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고소득층이나 자산가만 과세 대상이다.

얼치기 진보의 집권만능주의극소수의 사람들을 타깃으로 공격해 다중의 동의를 얻겠다는 구호는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훌륭한 선거 전략’일 수 있다. 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마저 내년 선거에서 참패하지 않으려면 ‘부자 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판이다. 그 파괴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을 버는 방법이 정당해야 하듯이 정권을 잡는 방법도 정당해야 한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겠다는 것은 천민 자본주의다. 마찬가지로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정권만 잡으면 된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것 역시 천민 진보주의다. 전선을 선명하게 형성하는 효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넘어서지 말아야 할 우리 사회의 금기는 있어야 한다.

세금을 깎아줄 때는 서민과 중산층에게만 혜택을 주고, 세금을 더 내야 할 때는 부자들에게만 부담을 떠안기겠다는 발상도 바른 길은 아니다. 증세를 한다면 당연히 세금을 납부할 능력이 있는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도 따져야 한다. 비효율이 없는지도 검증해야 한다. 세금 징수에 들어가는 비용도 들여다 봐야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이뤄지는 ‘부자 증세'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무개념’이다. ‘1%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자’는 식의 구호로는 진보를 자칭하는 세력이 정권을 쟁취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의 진보는 결코 이룰 수 없다.

현승윤 경제부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