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니 가문, 富와 지식을 사회와 민족 위해서만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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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문가의 위대한 유산“사람 일생에 세 가지가 뜻대로 이루기 어렵다고 했으니, 자식이 그렇고 명리가 그렇고 수명이 그렇다고 했겠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말이다.
이 중에서 가장 뜻대로 이루기 어려운 게 자식이 아닐까. 헝가리 산골 출신의 폴라니 가문은 아버지와 4남1녀의 자녀, 그 아들의 아들이 모두 이름을 남겨 자식농사에 성공한 가문으로 회자된다.아버지 미할리 폴라섹은 조국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는 학생운동가이자 혁명가로 활동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자 스위스로 망명해 철도건설업자로 변신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헝가리로 돌아가 조국을 부흥시키는 새로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직접적인 투쟁이 아닌 실용적인 투쟁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는 대신 헝가리에 철도를 건설하고 농업을 일으켜 유럽의 문명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부인은 러시아 백작 가문출신인데 그녀의 무정부적이고 보헤미안적인 사고는 자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부부는 4남1녀를 두었는데 루소와 제임스 밀이 주창한 방식에 따라 자녀들을 교육했다. 루소는 《에밀》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회의 위선과 부패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놓고(자연상태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폴라니 부부도 루소의 자녀양육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제임스 밀은 아들 존 스튜어트 밀이 태어나자마자 직접 조기영재교육을 해 10대 초반에 천재적인 사상가로 만들었던 인물이다. 폴라니 부부는 자녀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미리 구입해놓은 거대한 성으로 보내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게 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폴라니의 아이들은 존 스튜어트 밀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천재성을 드러냈다. 장남인 오토는 공학자이자 사업가로 성공했고, 차남 아돌프는 철도기술자로서 브라질로 건너가 철도사업에 뛰어들었다. 셋째인 딸 무지는 헝가리 민족음악운동의 선구자이자 ‘농촌사회학’의 창시자로 이스라엘 공동체 키부츠에 영향을 주었다.
넷째인 칼 폴라니는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과 컬럼비아대 교수를 지냈다. 막내 마이클은 물리화학자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어 과학철학자로 전향했는데 저서 《개인적 지식》에서 그 유명한 ‘암묵지(tacit knowledge)’를 주창했다. 암묵지란 경험과 학습에 의에 몸에 쌓인 지식을 뜻한다. 암묵지가 많이 저장될수록 그 사람의 내면은 깊어진다. 지식이 체화된 상태의 ‘내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의 아들 존 폴라니는 1986년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해 부친의 지적 전통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폴라니 가는 아버지에 이어 3남 칼도 헝가리를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1927년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지 편집장이었던 칼은 거액의 월급을 받았지만 한푼도 쓰지 않고 빈에 피란 중인 헝가리인들을 위해 전액을 내놓았다. 자신과 가족은 정작 빈 외곽의 빈민가에서 겨우 끼니를 이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 사실은 당시 칼 폴라니의 크리스마스 만찬에 초대돼 그의 집을 방문한 피터 드러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드러커는 자서전에서 “식사를 했는데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내 생애 최악의 식사였다”고 회고했다. 폴라니 가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가문에 요구되는 ‘공적 헌신성’을 생각하게 한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