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기업, 이란 무역제재에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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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대금 예치 우리·기업銀 5조 동결미국이 이란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모든 금융회사에 대해 미국 금융회사와 거래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고강도 이란 제재법을 추진하고 있다.
중계무역 중단…수출대금 못 받을수도
한국은 원화 결제를 통해 이란으로부터 수입하는 원유 대금만큼 수출을 해오고 있어 이 같은 법안이 시행되면 상당한 타격이 우려된다. 미국 상원은 지난주 관련 법안을 승인했고 하원은 이르면 다음주 중 통과시킬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5조원 규모 이란자금 동결
13일 정부와 금융계에 따르면 이란 제재법안이 내년 1월 발효되면 이란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전 세계 은행들은 미국 은행과 거래를 제한받는다. 한국은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대이란 제재가 시작된 지난해 10월부터 이란과의 원유 수입을 예외적으로 허용받았다. 대신 수입대금은 우리·기업은행에 원화예금 형태로 예치해 두고 있다.
이란 정부는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원유대금을 국내 은행의 원화 계좌에 쌓아두면서 이란으로 들어가는 수출대금과 정산하는 방식으로 한국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다. 즉 이란 수입업체가 이란 중앙은행에 수입대금을 결제하면 국내 은행들이 이란 중앙은행을 대신해 수출업체에 대금을 지급하고 사후 정산하는 방식이다.지난해 10월부터 지난 10월까지 1년간 한·이란 간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약 47억달러. 이 기간 평균 환율 1105원을 기준으로 약 5조2000억원의 이란 정부 돈이 국내 은행에 쌓여 있는 셈이다.
지난해 이란에서 들여온 원유의 수입대금은 69억달러, 올해 들어 10월까지는 무려 95억달러에 달한다. 반면 올 들어 국내 종합상사와 자동차, 전자업체의 대이란 수출은 45억달러로 원유 수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 의회가 제재법안을 통과시키면 국내 은행과 이란 중앙은행의 거래는 불가능해진다”며 “자동적으로 원유 수입도 중단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 경우 에너지 수급에 비상이 걸린다.
◆수출대금 못받을 수도
인천에서 중소 무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40대 김모씨는 지난 8월 중국산 의류를 이란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해오다 갑자기 이란 내 자금이 동결됐다는 소식을 받고 대금을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국내 은행들이 지난 9월부터 한국의 원화 계좌를 활용해 제3국(중국 대만 터키 이탈리아 등)의 이란 수출을 도와주는 한국 기업의 중계무역을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수출 신용장(LC)을 받아놓은 상태지만 은행 측으로부터 이란 내 자금을 찾을 수 없다는 통보만 받았다”고 말했다.
이란 중앙은행과 원화 결제를 할 수 있는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이 지난 8월 말 이란과의 중계무역 금융거래를 발견하고 즉각 중단한 데 이어 외환은행도 10월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문제는 강화된 이란제재법이 발효되면 이란 중앙은행의 원화 결제까지 막힌다는 점이다. 원화를 활용해 정상적인 거래를 해온 수출업체마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업계는 이런 기업이 500~600개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들이 소구권 행사를 검토하고 있는 것도 기업체로선 걱정거리다. 정상적인 거래에서는 수출업체가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해 쓰고 은행은 이란 수입업체가 내는 돈을 이란 중앙은행으로부터 받는다. 하지만 결제가 막히면 국내 은행이 이란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못받게 돼 수출업체에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 은행 관계자는 “소구권을 행사하면 기업체가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은행으로서도 자금 회수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일부 중소기업은 정부와 금융권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심기/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