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멜하우스' 서 군화 신고 취침…"불량설비 당장 폭파" 불호령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타계 - 용광로 닮은 인생

정계 투신후 모진 풍파
92년 대선때 反YS 선봉
명예회장 박탈…4년간 유랑
‘철강왕’ ‘한국의 카네기’ ‘영일만 신화의 주인공’.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따라 붙던 수식어들이다. 박 명예회장이 강조한 ‘제철보국(製鐵報國)’ ‘우향우(右向右) 정신’처럼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창업정신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포스코의 경영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박 명예회장은 1927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이 일자리를 구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학창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1940년 이야마북중에 진학한 그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제철 근로봉사에 동원됐다. 쇳물과의 첫 만남이었다. 1945년 일본 와세다대에 합격했지만 2년만 다니고 귀국,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에 입학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대령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임명됐으며,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하자 박 전 대통령은 그에게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을 맡겼다. 박 전 대통령은 곧이어 제철사업도 지시했다.

그는 1968년 창설요원 39명으로 포항제철을 창립했다. 포항 효자동 사택에서 줄곧 숙식을 해결하고, 군화를 신고 다니며 현장 직원들을 독려했다. 건설본부 이름은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독일 롬멜 장군의 이름을 딴 ‘롬멜 하우스’였다. 포철 신화를 만든 박 명예회장의 리더십 핵심에는 ‘우향우 정신’으로 통하는 개척정신이 있다. 그는 직원들에게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자”며 직원들을 이끌었다.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는 숱한 일화가 있다. 공사 현장을 돌다 발전송풍설비의 콘크리트가 울퉁불퉁한 것을 보고 호통을 쳤다. 굴뚝이 70m까지 올라갔지만 부실공사로 판단해서다. 그는 당장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 폭파사건은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MIT 등 미국 유명 경영대학의 교재에 모범적 경영관리 사례로 실렸다. 제철소 건설이 늦어지자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전원이 안전모 색깔을 모두 빨간색으로 바꿔 썼던 일화도 유명하다. 예정보다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9일 한국 최초로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 나왔고, 한 달 뒤 연간 조강생산 능력 103만t의 1기 고로가 완공됐다. 1978년 중국의 실력자였던 덩샤오핑이 일본의 신일본제철을 방문해 중국에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박태준을 수입해야겠다”고 말한 것도 유명한 에피소드다. 창립 당시 16억원이던 포스코의 자산 규모는 지난해 69조4000억원으로 43년 만에 4만3000배 이상 늘었다. 1990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를 고인에게 수여하면서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박태준) 귀하의 삶에는 끊임없는 지상명령이었다”고 치하했다.

그의 삶에는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계에 투신한 뒤에는 모진 풍파도 겪었다. 1981년 정계에 진출, 포철 회장을 겸임하며 4선 의원에 여당 대표까지 지냈던 그는 1992년 민자당 대권주자 경선 과정에서 반YS의 선봉에 섰다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세무조사를 받고 탈세와 뇌물수수 혐의까지 더해져 포철 명예회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일본 등에서 4년여간 유랑생활을 했다. 모친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였다. 1997년 11월 자민련에 입당해 총재를 맡았고,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01년 포스코 명예회장에 재추대됐고, 2008년부터 자신의 호를 딴 사회공헌재단인 청암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왔다.

장창민/이유정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