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김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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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초저금리의 엔화로 무장한 일본 와타나베 부인들의 투자규모는 한때 도쿄 외환시장의 30%에 달했다고 한다. 뉴질랜드 채권과 정기예금 상품에 투자하자 뉴질랜드 달러화 값이 22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기도 했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세계 금융의 평화는 와타나베 부인들에게 달렸다’고 진단했을 정도다.
와타나베 부인들은 집안일을 해가며 PC를 이용해 재택 투자를 하는 게 보통이다. 오전 6시쯤 일어나 PC를 켜고 간밤 뉴욕시장에서의 엔·달러 환율 등 외환시세와 주가를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때 오를 것 같은 외화에 매수 주문을 내기도 한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다음 청소 세탁 등 집안일을 하다가 오후 10시부터 본게임에 들어간다. 12시까지 2시간쯤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에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외환이나 주가 변동폭이 큰 날은 다음날 새벽 1~2시까지 거래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12시쯤 잠자리에 든단다.금융위기 이후 엔화 강세로 와타나베 부인들의 투자열기가 주춤했을 땐 미국의 ‘스미스 부인’이 그 자리를 메웠다. Fed의 저금리 정책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자금이 고금리 신흥국으로 흘러가는 데 미국 주부들이 가세한 것이다. 유럽 재정위기로 달러화 강세와 유로화 약세 현상이 나타나자 유럽의 ‘소피아 부인’이 주목을 받았다. 와타나베 부인에는 못미쳤지만 스미스·소피아 부인들도 신흥국 증시 호황과 통화가치 상승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줬다.
우리 증권시장에서도 ‘김씨 부인’들이 활약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여윳돈이나 남편 월급으로 집에서 외국 주식을 사고 파는 주부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해외주식투자는 밤에 주로 이뤄지는 만큼 상대적으로 시간에 여유가 있는 주부들이 많이 참여한다는 거다. 한 증권사가 이달 초 해외주식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홍콩여행 추첨 이벤트에서 당첨자 10명 중 4명이 주부들이었다.
집에서 HTS로 간편하게 투자할 수 있는 데다 국내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상태인 게 김씨 부인들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투자대상은 주로 홍콩시장에 상장된 중국 주식과 미국시장의 상장지수 펀드(ETF)란다. 위험도 있다. 환율 변동에 직접 노출되는데다 투자 정보를 얻는 데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주식매매 차익에 대해 양도세도 내야 한다. 충분한 준비가 없으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투기꾼이 득실대는 국제 금융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김씨 부인들이 어떤 성과를 낼지 궁금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