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처럼 살아라" 99세 장수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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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이루면 일찍 무너지는 법…봄에 싹 돋아 늦가을에서야 활짝
詩酒와 함께 유배 살았던 99세 소총…76세에 첫 장가들어 아들까지 낳아
요 며칠 찬바람이 불고 춥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된서리를 맞으면서도 내 작은 정원을 지켜오던 국화가 기어이 시들고 말았다. 떨기로 피어 가을 내내 고요한 풍경을 밝혀주던 꽃이다. 이제 시들었지만 청수한 고사(高士)인 양 꽃잎의 색태는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 국화를 보면 조선시대에 99세를 살았던 기인 소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이 떠오른다.

소총이 지은 《소총유고(篠叢遺稿)》에는 상사(上舍·소과에 합격한 사람)인 김씨 성의 젊은이에게 준 글(贈金上舍書)이 있다. 소총은 이 글에서 “병을 다스리는 방법은 혈기를 잘 조절하고 보호하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온 몸에 가득한 혈기를 잘 조절, 보호하면 오장육부가 따라서 튼튼해지고 오장육부가 튼튼해지면 객풍(客風)이 내부에 엉기지 못해 혈기가 차갑거나 부족한 폐해가 없게 되지요. 의가(醫家)의 모든 처방과 선가(仙家)의 온갖 비결들이 모두 양생술(養生術)인데 음식의 절제를 먼저 말하고 정신의 보호를 뒤에 말하였지요. 따라서 만약 음식을 잘 절제하지 않고 정신을 잘 보호하지 않는다면 혈기가 들뜨고 허하여 객풍을 불러들이기 십상이며 그렇게 되면 몸이 위태한 지경에 빠지고 만다오.”

그러면서 국화에 비유해 양생론을 펼친다.

“국화가 늦가을에 피어 된서리와 찬바람을 이기고 온갖 화훼 위에 홀로 우뚝한 것은 일찍 이루어져 꽃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무릇 만물은 일찍 이루어지는 것이 재앙이니 빠르지 않고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그 기운을 굳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서서히 천지의 기운을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억지로 정기를 강하게 조장하지 않으면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히 성취되기 때문이라오. 국화는 이른 봄에 싹이 돋고 초여름에 자라고 초가을에 무성하고 늦가을에 울창하므로 이렇게 되는 것이라오. 대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 또한 어찌 이와 다르리오. 옛사람들이 일찍 벼슬길에 올라 영달하는 것을 경계했던 까닭도 이 때문이지요.”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대저 수명의 길고 짧음은 모두 자기 스스로 취하는 것이지 남이 그렇게 되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이 주고 빼앗는 것이 아니라오. 내가 이와 같이 오래 사는 것은 하늘의 이치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했기 때문이라오. 다만 하늘이 나에게 내려 준 일신의 원기가 본래 그다지 강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 이와 같이 늙고 말았다오. 그러나 만약 이런 방법을 버리고 급급히 다른 데서 장수의 방법을 찾았다면 이렇게 늙은 나이까지 살지도 못했을 것이오. 내가 지금 칠순인데도 머리털이 희지 않고 가는 바늘에 실을 꿸 수 있으니, 나만한 사람도 드물 테지요.”

소총은 방외인(方外人)의 삶을 산 사람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인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아전 집안에서 태어났고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다고 한다. 신분이 미천한 재사가 으레 그렇듯이 소총도 치솟아 오르는 울분과 객기를 시주(詩酒)로 달래며 방달불기(放達不羈)한 삶을 살았다.세조의 왕위 찬탈이 있은 뒤로는 노장(老莊)에 심취하여 남효온·이총·이정은·조자지 등과 어울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했다. 특히 괴애 김수온·추강 남효온·매월당 김시습과 친했다. 무오사화 때 제주에 유배돼 관노로 있다가 중종반정으로 석방됐다. 76세에 처음으로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도가(道家)의 양생술에 조예가 깊었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만년에 명산을 편력하다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여하튼 기인이었음은 분명하다.

소총은 99세를 살았으니 조선시대 이름이 알려진 인물 중에서 가장 장수한 분이다. 시주로 울분을 토로하는 사람은 대개 단명하게 마련이니 소총의 장수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대개 일찍 이루어지면 일찍 무너지고 더디 이루어지면 더디 무너지는 게 만물의 법칙이다. 동물도 회임 기간이 길수록 수명이 길거니와 초목도 더디 자랄수록 수명이 길다. 일상에 쓰는 물건인들 다르랴. 오래 공력을 들여서 단단하게 만든 것이 오래 갈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오늘날은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어간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있노라면 사람들은 어느새 저만큼 앞서 가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 변화에 적응하려고 자기 발걸음을 잊은 채 바삐 움직인다. 그리하여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이루고 있지만 몸은 원기를 소진하고 정신은 사물에 빼앗겨서 흡사 육체가 없는 허깨비처럼 빈 형상만으로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많다.송나라 주렴계(周濂溪)는 국화를 꽃 중의 은일(隱逸)이라 했다. 국화가 다른 꽃들이 영화를 누리는 봄과 여름에 자신을 드러내었다면 늦가을까지 고고한 자태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국화처럼 은일의 삶을 살기는 어렵겠지만 국화에게서 삶의 지혜는 배워야 할 것 같다.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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