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동전 훼손 처벌, 지폐 훼손은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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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용석 경제부 기자 hohoboy@hankyung.com지난 17일부터 개정 한국은행법이 시행됨에 따라 주화(동전) 훼손이 법적으로 금지됐다. 한은법 제53조 2항은 ‘누구든 한은의 허가 없이 영리 목적으로 주화를 융해 분쇄 압착 또는 그 밖의 방법으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또 105조2항은 ‘불법 주화 훼손에 대해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그동안 법정화폐인 주화를 훼손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적발됐지만, 마땅한 처벌 규정이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바람직한 조치다. 그럼 지폐를 훼손하면 어떻게 될까. 주화보다 액면가가 높은 지폐 훼손은 더 심한 처벌을 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폐 훼손은 법으로 금지돼 있지 않고, 처벌 대상도 아니라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개정 한은법은 주화 훼손만 금지했을 뿐 지폐 훼손은 별도로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규정이 왜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한은 관계자는 “지폐는 (주화와 달리) 제작단가가 액면가보다 월등히 낮은데 누가 지폐를 훼손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한마디로 지폐 훼손 가능성은 없다고 미리 단정한 셈이다. 한은법 개정에 관여한 기획재정부나 국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과거 주화 훼손 사례를 보면 한은의 ‘상식’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예컨대 2008년 부산에선 옛 10원짜리 주화를 낙엽 모양의 펜던트로 만들어 판매한 사례가 신고됐다. 이 경우 주화 훼손은 동전에 포함된 금속의 가치나 동전의 액면가와는 아무 상관 없는 ‘기념품’ 용도였다.만약 누군가 1000원권이나 5000원권 지폐를 일정한 모양으로 잘라낸 뒤 ‘행운의 상징’이나 ‘부자 되세요’ 같은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 기념품처럼 판다면 어떻게 될까. 명백한 법정화폐 훼손이지만 처벌 규정이 없어 뒷짐만 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뒤늦게 ‘지폐 훼손 금지 및 처벌’ 조항을 신설하겠다며 한은법 재개정 소동을 벌여야 한다. 지난 8월 한은법을 개정할 때 주화뿐 아니라 지폐 훼손도 금지했다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됐다. 근시안적 한은법 개정으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를 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주용석 경제부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