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산업계의 청양고추 '히든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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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기업'이 경제 떠받쳐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엔 구수한 된장찌개가 제격이다. 여기에 어슷하게 썬 고추 몇 개를 올리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아마도 구수한 맛과 칼칼한 매운 맛이 궁합을 잘 이뤄 우리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일 게다. 한국의 토종 고추 가운데 청양고추가 참 맵다. 몸집은 자그맣지만 매운 맛을 내는 성분인 캡사이신을 가득 품고 있어 입맛 돋우는 데 그만이다. 아울러 미네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다이어트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양념계의 지존이라 할 만하다.
세계시장 누빌 강소업체 많아져야
김용환 < 한국수출입은행장 yong1148@koreaexim.go.kr >
유럽의 강국 독일 경제에도 우리의 청양고추와 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1000여개에 달하는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이다. 세계적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 박사가 만든 용어로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고 강한 기업’을 가리킨다. 이 히든 챔피언이 해외 곳곳을 누빈 덕분에 독일은 2002년부터 무려 7년간이나 세계 수출 1위를 차지했다. 지금도 독일은 이들이 든든한 초석이 돼 유럽 재정위기 속에서도 강한 경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필자가 얼마 전 방문한 경기도의 한 중소업체는 작고 강한 기업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냉장고용 냉각기와 에어컨 부품을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에 공급하는 회사인데 자체 브랜드로 생산하는 소형 생활가전도 성능이 좋아 소비자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 중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단연 ‘물’을 만들어내는 제품이었다. 이걸 연금술(鍊金術)이 아닌 연수술(鍊水術)이라 불러야 하나. 제습기 원리를 이용한 것인데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하루에 2ℓ 가까운 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이 제품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오면 아마도 만성적 물 부족에 시달리는 나라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엔 이런 강소기업이 그다지 많지 않다. 국내 기업 중 99%가 중소기업이고 이들이 일자리 창출의 88%를 담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대기업이 수출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대기업 편향적 경제 구조가 강소기업 부재의 큰 원인 중 하나라 하겠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기업생태계의 허리 역할을 하는 중소중견기업을 키우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수출입은행도 세계시장을 누빌 글로벌 중견기업을 많이 키워보자는 취지에서 지난해부터 ‘한국형 히든 챔피언’ 육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필자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오늘도 금융이란 물과 거름을 뿌리고 있다. 우리 산업생태계 밭에 파종한 히든 챔피언이란 청양고추가 잘 자라나 세계시장에서 제대로 매운 맛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말이다.
김용환 < 한국수출입은행장 yong1148@koreaexim.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