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 "재래식 양조기 40점…'전통주 빚기' 장인정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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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장품 - '술 제조기계'포천 운악산 자락에 위치한 전통술 갤러리 ‘산사원’. ‘산사춘’으로 유명한 한국 전통술 제조회사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이곳 박물관에 가면 일제시대 조선 양조장에서 쓰던 양조기계 일습(一襲)을 볼 수 있다. 모터, 펌프, 저울 같은 간단한 도구는 물론 세미기(洗米機), 술밥냉각기, 주주기(注酒機), 여과기, 증류기, 술병마개기까지. 모두 합치면 40여점이나 되는 이 기계들은 술 제조 공정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빠짐없이 망라한다. 30여년 전부터 양조 관련 물건을 수집해온 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52)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이다. 산사원에 있는 전통술연구소에 1주일에 한 번씩 가는데 그때마다 배 사장은 박물관에 먼저 들러 이 기계들을 ‘문안’한다.
배 사장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도인(道人)’ 같은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구했다. 회사를 창업한 지 얼마 안 돼 어려움이 많았던 1998년. 배 사장이 양조 관련 물건을 수집한다는 걸 어디서 들었는지 한 남자가 찾아와 이 기계들의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을 보자마자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는 게 배 사장의 말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땅을 치며 후회할 것만 같았다. 결국 5000만원을 주고 물건을 사고야 말았다. 당시 배 사장이 가지고 있던 거의 전 재산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그날 밤 배 사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큰 돈을 쓴 게 걱정돼서가 아니라 기계를 손에 넣은 게 뿌듯해서였다.배 사장이 산 일습은 한국 양조장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물건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조장이 없었고 모두 가양주(家釀酒) 같은 음성적 형태로만 술을 빚었다. 사대부들이 ‘양식으로 술을 만드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일제가 양조업을 허가제로 만들면서 한국에 처음 양조장이 생겼다. 당시 양조업자들이 일본에서 기계를 수입해 양조장을 차렸다. 배 사장이 모은 일습도 당시 양조업자가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다.
배 사장은 “기계를 살펴보면 부품 하나, 마디 하나에 모두 장인의 손길이 스며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양조기계를 만들 정도가 되려면 발효의 원리에 대해 통달해야 하거든요. 모든 걸 수작업으로 했기 때문에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만들어지고 이런 게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힘을 덜 들이면서 좋은 술을 빚을까 궁리한 결과가 기계에 담겨 있어요. 기능적인 면에서 도가 트면 미적인 면에서도 살아납니다. 이 기계처럼 장인이 만든 물건은 그래서 아름다운 겁니다.”
배 사장에게 이 일습은 단순한 전시용품이 아니다. 언젠가 이 기계들을 사용해 실제로 술을 빚을 생각이다. 오래 된 기계여서 설계도나 매뉴얼을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수소문하면서 제조회사를 찾아 나서고 있다. 기계에 대한 고서(古書)도 보면서 공부한다. “어떤 게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계로 만들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술이 나올 겁니다.” 사실 그는 양조기계가 아닌 ‘아날로그 정신’을 연구하고 있다. ‘아날로그적 술 빚기’가 전통술 회사의 길이라고 믿기에 배상면주가의 앞날을 연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일습은 그에게 회사 경영의 나침반이기도 하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