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자동차 시장 주도하는 '적당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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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기자의 car&talk중국 자동차 시장에 ‘적당품’(good enough product)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적당한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비자들의 구미를 맞춘 제품이다. 중국 자동차 시장에 이같은 적당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현상이다.
중산층 급증하면서 등장…적당한 품질에 합리적 가격
한국은 신차 출시되면 가격 수백만원씩 올라
이런 현상은 중국 자동차 시장의 모델별 판매 순위(지난해 기준)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강표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의 ‘중국자동차 시장환경변화와 부품공급체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시장 판매 1위는 토종브랜드인 BYD의 ‘F3’로 26만4400대가 팔렸다. F3는 도요타의 준중형 세단 코롤라의 9세대 모델(2003~2008년)을 모방한 제품이다. 2위는 폭스바겐의 ‘라비다’(25만1600대)로 준중형 세단 제타의 4세대 모델이다. 이 모델은 1999~2005년 생산된 모델로 중국에서만 생산하고 있다. 3위 역시 폭스바겐 제타(1991~1999년)인데 현재 국내에서 출시되는 제타의 할아버지 격이다. 11위인 폭스바겐 ‘보라’는 제타의 아버지 격이다. 중국에선 폭스바겐 제타의 2,3,4,5세대 모델이 동시에 판매되고 있는 셈이다.
또 GM 뷰익의 ‘엑셀르’(5위)는 대우의 라세티를 GM이 부분변경해 내놓은 모델이다. 모방 제품이나 구형 모델은 편의사양과 성능이 낮은 만큼 가격도 낮다. F3는 현재 5만3000위안에 판매되고 있다. 도요타 코롤라(10만3000위안)의 절반 수준이다.
중국 승용차 판매량 상위 15위 모델 중에 현지 기업의 모방 모델,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현지 전략용으로 판매하는 구형 모델은 총 10개에 달한다.현대차도 중국 공장에서 아반떼 XD와 HD 등 구형 모델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이 같은 적당품은 전체 자동차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강표 교수는 “중국 중산층의 구매력은 상위 중산층이 6000~1만4000달러, 하위 중산층이 3500~6000달러로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며 “이들 중산층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자동차 시장에서 적당품이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적당품의 약진은 자동차 부문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TV시장에서도 소니 필립스 파나소닉 등 프리미엄 브랜드보다 하이센스 스카이워스 TCL 등 현지 기업들의 제품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떠올랐다. 자동차 회사들이 날이 갈수록 고급화·최첨단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정작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은 중저가 제품의 구형 모델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중국뿐만이 아니다. 폭스바겐은 내년 유럽 시장에 1만유로짜리 소형차 ‘UP!’을 내놓을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인도, 중국과 같은 신흥 시장이 아닌 유럽 시장에서도 UP!을 시작으로 저가 자동차 경쟁이 벌어질지 주목하고 있다. 내년에는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 폭스바겐 측은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신차가 나올 때 마다 편의사양을 대거 추가하고 가격을 올리는 프리미엄 전략을 펴고 있다. 올 하반기 나온 현대차의 신형 i30, 기아차의 신형 프라이드가 대표적이다.한국 소비자들이 다른 나라 소비자들과 달리 편의사양에 대한 요구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차가 나올 때마다 높아가는 국산차의 가격을 쳐다보면 중국의 적당품들이 부러워질 때도 있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