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자선 바자회 다 좋았는데…사장님 기증품만 안 팔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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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헌 뒷얘기대기업 마케팅 본부의 막내사원 김모씨는 연말이 되면 도통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다. 3년째 막내로 있으면서 사내 모든 봉사활동에 ‘대타’를 뛰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출석표까지 만들며 모든 직원의 고른 참여를 독려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자네가 좀 갔다와야겠어”라는 한 마디에 김씨는 이번 달에만 5번의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전사 차원의 김장행사에서부터 본부 내 팀별 어린이 시설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가지가지다. 김씨의 푸념 한마디. “고참들은 사회공헌활동이라면 무조건 가욋일로만 여겨요. 그러니 저 같은 ‘쫄따구’에게만 미루죠.”
김장행사 홍보자료 냈더니…그날이 한국야쿠르트 김장날
봉사활동도 계급 차별
"자네가 좀 다녀와야겠어" 막내라는 이유로 한달에 5번도
"우리가 봉입니까"
좋은 뜻으로 갔는데 일꾼 취급 "오지말고 성금만 달라" 요구도
연말이 되면 각 기업들은 ‘나눔 경영’의 슬로건 아래 사회공헌활동으로 분주하다. 이맘 때만 되면 신문 동정란은 김장, 연탄배달, 양로원·보육시설 방문, 군부대 위문 등 기업들의 사회공헌활동으로 빼꼭하게 찬다. 봉사활동에 보람을 느껴 사회공헌팀을 자청하는 직원들도 있지만, 사역 끌려가듯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강제 동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회사 이미지 제고의 명분아래 주말을 반납해야 할 때는 여친·남친 만들기에 한창인 신입사원들의 입이 한발은 나온다. 연말 기업 사회공헌 활동에 얽힌 명암을 짚어본다. ◆사회공헌활동도 눈치있게 해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이건 성경구절에나 있는 얘기다. 기업들에 사회공헌활동은 가장 좋은 홍보거리의 하나다. 그러다 보니 연말 사회공헌철이 되면 각사 홍보팀에는 비상이 걸린다. 공기업 K사의 홍보팀장은 여름 휴가철이 지난 뒤부터 정기적으로 체크하는 날짜가 하나 있다. ‘세계 최대의 김장행사’로 꼽히는 한국야쿠르트의 김장 날짜를 사전에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노란 유니폼의 야쿠르트 아줌마 2000여명이 서울시청 앞에서 김치를 담그는 모습은 시쳇말로 ‘사진발’이 그만으로, 방송과 신문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수 놓는다. 이런 날에 김장행사를 하는 건 언론 홍보를 포기하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한국야쿠르트 행사와 날짜가 겹쳤을 때 불려가 신나게 깨진 악몽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 말고도 김장행사를 계획하고 있는 모든 기업들의 필수 체크 포인트 중 하나는 한국야쿠르트의 행사 날짜일 겁니다.”
회사 사회공헌활동에서 또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우한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는 동시에 상사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용품업체의 김 과장은 올해 연말 자선 바자회가 시작되자마자 사장이 내놓은 가죽 장갑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팔려야 하는 ‘머스트 세일’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자선 바자회는 전 임직원이 자신의 애장품을 내놓고 판매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하는 행사로 지난해 처음 시작됐다. 그런데 첫 해부터 사장이 내놓은 중고 퍼터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바람에 행사장 분위기는 머쓱해졌다. 담당 임원은 올해 행사 기획을 맡은 김 과장에게 “사장님 물건은 반드시 처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김 과장은 여차하면 자비로 구매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김 과장의 생각은 기우였다. 지난해 시장에서 외면받은 게 못내 분했던지 사장은 아끼고 아끼던 명품 브랜드의 가죽장갑을 내놨다. 인기도 폭발적이었다. 각 부서가 ‘사장님 물건’을 구매 1순위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가죽장갑은 결국 경매에 부쳐져 뜨거운 경합 끝에 고가에 팔려 나갔고 사장의 입은 귀에 걸렸다.한국투자증권 자선 바자회에서도 사장이 내놓은 물건이 화제가 됐다. 한 직원이 사장이 내놓은 명품 넥타이를 15만원에 매입한 것. 판매가를 5만원 정도로 예상했던 사장은 물건을 구입한 직원이 기특했던지 직접 불러 넥타이 한 벌을 더 선물했다. 직원은 15만원을 투자해 명품 넥타이 2개를 챙기고, 사장께 귀여움도 받고, 불우이웃도 돕는 1석3조의 효과를 얻은 셈이 됐다.
◆‘봉사맨‘과 ‘요리의 여왕’
회사 봉사활동을 계기로 삶의 방향이 바뀐 케이스도 있다. 소비재 기업에 근무하는 박 대리는 사내에서 ‘요리의 여왕’으로 통한다. 7년 전 우연히 급식 지원을 갔다가 봉사활동이 주는 즐거움과 보람에 눈을 뜨게 됐다. 박 대리는 이후 어려운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에, 재능기부를 위해 한식, 중식, 양식 등 조리사 자격증도 3개나 땄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현 대리는 사내에서 ‘봉사맨’으로 통한다. 동료 직원들의 놀림에서 시작된 별명이다. 그는 올해 초 음주 검사에 걸렸다가 겁이나 도주하다 잡혀 공무집행방해까지 덮어져 12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처음엔 벌로 시작한 일이지만, 주말마다 인근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을 나가다가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하던 봉사활동의 보람을 느끼게 됐다. 그는 사회봉사명령기간이 끝난 지금도 봉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음주운전이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 셈이네요. 벌 받아 봉사활동한다고 해서 놀림으로 붙여준 ‘봉사맨’이 진짜 별명이 된건가요.”
◆봉사활동한다고 ‘봉’으로 보지 마세요
봉사활동에 얽힌 얘기라고 해서 좋은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탁 대리가 속한 마케팅팀은 한 어린이 시설과 자매결연을 맺고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봉사활동을 간다. 하지만 반년이 넘도록 그는 아이들의 얼굴은커녕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처음 몇 달간 그가 한 것이라곤 시설 옆 텃밭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땅을 고르고 돌을 옮기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다. 텃밭을 다 만들고 나서는 이제야 아이들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졌지만, 어린이 시설 관계자는 이번에는 건물 창문을 수리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와 동료들이 항의하자 시설 관계자는 “아이들을 돌봐줄 봉사자는 많다”며 거절했다. “봉사자를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일꾼 대하듯 하는 태도가 불쾌했습니다. 회사도 자매결연을 맺을 때 시설에 대한 충분한 조사를 해야할 것 같아요.”식품회사에 다니는 심 과장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모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외부모가정 보호시설에 동료들과 학습봉사를 나갔다가 보람을 느끼기는커녕 실망만 했다. 아이들이 봉사자에게 도를 넘어선 언행을 해도 전혀 제지를 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봉사자가 넘치니 차라리 돈으로 주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세 번까지 참았던 심 과장은 결국 회사에 강력하게 봉사처 교체를 요청했고, 지금은 지적장애보호시설에 나가고 있다. “새롭게 나가는 복지원은 직원분들이 정말 적극적이고 아이들도 착해서 좋아요. 봉사활동자가 배려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시당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강영연/고경봉/노경목/윤성민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