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평양의 봄'은 오지 않는다

북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돈 퍼주는 '유연성'은 안돼

추창근 기획심의실장·논설위원
김정일은 떠났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은 그의 어린 아들 김정은으로 넘겨졌다. 김일성의 ‘백두혈통’ 말고 어떤 권위도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는 왕조의 자연스런 세습이다.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다. 북한의 정체성은 ‘김일성의 나라’로 규정돼 있다. 북한 최상위의 통치규범인 조선노동당 규약은 노동당을 ‘김일성의 당’으로,북한을 김일성이 창건한 ‘김일성 조선’으로 못박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북한은 1998년 개정한 헌법도 ‘김일성 헌법’으로 명기했다. 무엇보다 과거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승계 자체가 핏줄보다 우선되는 왕권계승의 전제조건이 없다는 증거였고,지금 3대 김정은으로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다. 김정일 사망 이후 북이 지체없이 김정은을 ‘혁명위업의 계승자·인민의 영도자’로 선언한 데 이어 ‘어버이’ ‘21세기의 태양’ ‘최고사령관’이라는 지존(至尊)의 호칭을 쏟아내고 있는 배경도 그것이다.이 말도 안 되는 비정상이 북의 일상적 현실이고 보편적 의식구조이자 지배 이데올로기다. 북의 통치는 오직 절대왕정의 관점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대중민주주의에 기반한 현대국가의 보편적 상식과 가치 잣대는 무의미하다. 김정은의 북한이 앞으로 어디로 갈것인지 수많은 진단과 분석·전망이 나오지만 대개가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인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김정은이 북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까지 그의 얼굴조차,이름이 ‘정은’인지 ‘정운’인지도 몰랐다. 아직 나이가 스물일곱인지,스물여덟인지도 알지 못한다.

물론 의구심은 크다. 김정은이 어린 나이의 미숙함까지 감출 수는 없고 그의 어떤 리더십도 검증된 바 없다. 김정일은 1970년대 초 후계자로 낙점된 이후 20년의 권력승계 과정을 거쳤다. 당 중앙군사위원장·당 총비서·국방위원장 등 모든 정상의 자리를 꿰찬 것도 김일성이 죽은 뒤 몇 년 지나서였다. 반면 김정은이 그의 아버지 김정일과 동격(同格)의 절대적 위상으로 올라서는 발걸음은 너무 다급하고 버거워 보인다. 아직 권력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지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왕권’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그만이 김정일의 유훈을 계승할 자격을 갖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 김정은을 통해 백두혈통의 신성(神聖)은 더욱 견고해졌다. 어느 누가 김정은에 반기를 든다면 패륜(悖倫)이고 역모(逆謀)다. 그런 곳이 북한이다.일각에서는 민중혁명으로 몰락한 리비아 카다피와 이집트 무바라크처럼 가까운 장래 김정은 체제의 붕괴 또한 필연이라고 말하지만 어림없는 얘기다. 그런 혁명도 인민이 먹고 살 만할 때 가능한 일이다. 당장 굶주리는 현실이 절박한,지나치게 궁핍한 사회에서는 민중의 의식을 바꿀 동력이 생겨나지 못한다. 내부의 정보유통까지 철저히 봉쇄된 상황은 혁명의 에너지가 결집될 수 있는 여지도 없애 버린다.

북한은 어제와 오늘처럼 내일 또한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평양의 봄’을 앞으로 오랫동안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물론 숨쉬기 조차 힘든 압제가 인간본성인 자유를 계속 억압할 수 없고, 인민들을 굶겨죽이는 수십년의 실패한 왕조통치가 영원할 수는 없다. 한계점으로 치닫는 불합리와 부조리가 언젠가는 곪아터질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은 너무 멀어 보인다.

김정은 시대에 우리 정부는 유연성을 내세워 얼어붙은 대북관계의 리셋(reset)을 말한다. 외교는 유연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굴신(屈伸)해야 하는 것도 맞다.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필요한 계기인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어떤 유연성도 북한의 본질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유연성을 빌미로 북이 요구할 것은 오직 하나 돈이다.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유연성 또한 결국은 돈을 주는 것이 그 한계다. 북한에 돈 퍼붓고 돌아온 것이 핵무기이고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이다. 대북전략의 출발점이다.

추창근 기획심의실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