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호르무즈 해협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jhkim@hankyung.com
정화(鄭和)는 중국 명나라 때 항해왕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중국과 중동 서남아 동아프리카를 잇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개척했다. 그의 함대는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보다 다섯 배나 큰 배에 채소밭까지 갖춘 채로 바다를 누벼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까지 도달했다니 지금 상상해도 놀랍기만 하다.

정화는 일곱 번의 항해 가운데 두 차례에 걸쳐 중동에 깊이 들어간다. 그 중심이 바로 호르무즈해협이다. 마지막 항해에서는 호르무즈 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함대 일부는 페르시아만으로 올라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참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화가 호르무즈해협을 환대받아가며 누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색목인(色目人)이자 회교도인 덕이 컸다. 1371년 윈난(雲南)성 쿤양(昆陽)에서 태어난 그의 성은 마(馬), 이름은 싼바오(三保)였다. 그의 선조는 원나라 때 서역에서 이주해 온 이슬람 교도였다. 윈난성이 명에 정복되자 그는 포로로 잡혀가 거세된 후 환관으로 연왕(燕王) 주태를 섬겼다. 주태가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다. 그는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으로 발탁되고 영락제의 명령으로 대양 함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해 정(鄭)이라는 성을 하사받는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신밧드가 바로 정화라는 주장이 있는 것도 그의 외모와 종교, 그리고 일곱 차례의 대양 항해 경험에서 비롯된다. 신밧드의 고향이 호르무즈해협 인근의 항구도시 소하르라는 점도 그렇다. 정화가 일곱 번째 항해를 마치지 못하고 사망한 곳도 호르무즈다.

호르무즈해협의 호르무즈섬에는 정화 함대가 떠난 지 80년 뒤 포르투갈 함대가 상륙한다. 1507년 포르투갈인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는 이 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페르시아만의 모든 교역을 통제했다. 너비 50㎞의 해협을 통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위치다. 영국-페르시아 연합군대가 이 섬에서 포르투갈 병사들을 내쫓은 것은 1622년이다. 종교학자이자 선교자인 스티븐 닐은 1622년을 중동 지역에서 힘과 교역의 균형이 완전히 바뀐 해로 평가하고 있다.

이란이 미국의 압박에 대항해 호르무즈해협의 봉쇄를 협박하고 있다. 세계 원유 거래량의 20%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이 해협이 막히면 한국 중국 일본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600년 전 개척된 정화의 항로가 위기에 놓였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