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곡마을 농부들이 쓴 삶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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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할머니부터 7세 어린이까지‘올해 논에다 콩 심었더니/거름이 너무 많아 키가 커서/베어줄까 걱정을 했는데/마침 노루가 들러 적당히 끊어 먹어서/올해 콩 농사는 풍년 들겠네’(정계순의 ‘밭농사’ 중)
105명 참여한 시집 '소, 너를…' 출간
전남 곡성군 죽곡면. 보성강과 섬진강이 휘돌아 흐르면서 무성한 대숲을 이룬 ‘죽곡(竹谷)’은 시의 마을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농민열린도서관에 모여 시를 쓴다.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드시다 말고 와서, 고추밭 매던 아낙네는 흙 묻은 손으로 시를 짓는다.죽곡마을 사람들이 펴낸 시집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강빛마을)에는 맑고 투명한 시들이 가득하다. 88세 할머니부터 일곱 살 아이까지 2000명 남짓한 주민 중 105명이 시집에 이름을 올렸다. 죽곡마을 시문학상 수상작을 비롯해 114편의 시가 들어 있다.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養牛由來歲月深)/돌투성이 밭갈 때가 언제이던가(石田耕牛深時間)/담벼락에 세워둔 쟁기는 언제 쓰려는가(牆不知何歲月)/세월이 가는 동안 녹이 슬고 말았네(歲月流去銹故障)’
한시 ‘牛-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를 쓴 태평리의 최태석 씨는 요즘 시에 푹 빠져 있다. 올해 환갑을 맞은 최씨는 초등학교를 마친 후 평생 농사를 지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배운 한문을 잊고 살다 이번 시집 공모를 계기로 잠재됐던 ‘시심(詩心)’이 분출했다. 자신이 기르는 소처럼 우직하게 매주 두어 편의 한시를 썼다.‘왜 이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았는지/이제는 몹쓸 놈의 병을 얻어/발 한 짝도 내디딜 수가 없네/…/저 산에 해 저물어가듯이 내 인생도 저물어가네’
88세의 김봉순 할머니는 ‘내 인생’에서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호박 덩굴 자라는 모습과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담담하게 노래한다. 소풍가는 날 할머니가 싸준 김밥, 연필과 지우개, 애국가, 앵두나무, 나의 엄마 아빠 등을 노래한 아이들의 시도 눈길을 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시어들에는 시골 생활의 애환과 따뜻한 감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시집에는 백무산 시인의 머리시, 조은산 시인의 축하시도 실렸다. 시를 쓴 죽곡마을 사람들의 면면과 애틋한 사연들도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여행작가 유성문 씨는 죽곡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집을 기획한 김재형 죽곡농민열린도서관장은 “2년 후에는 수필과 단편소설을 묶은 ‘마을이야기책’을 만드는 등 마을문집을 꾸준히 내고 싶다”며 “이런 과정을 통해 농촌의 자생적인 문화 창조력이 회복되면 농촌은 문화 소외지역이 아니라 문화 창조의 근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