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선물과 뇌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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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영국의 철학자이면서도 고위 관직에 올랐다. 국회의원, 검찰총장 등을 거쳐 1618년엔 국왕 제임스 1세의 최측근인 국새상서 겸 대법관이 된다. 잘나가던 베이컨의 발목을 잡은 건 뇌물이었다. 주변에선 그가 20여건의 부패사건에 연루돼 10만파운드를 챙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상원조사에서 500파운드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는 ‘새해 선물’로, 1000파운드의 돈은 ‘대법관 취임 기념’으로 받았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소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공직을 박탈당하고 런던탑에 갇혔지만, 사실 선물과 뇌물을 구분하는 건 간단치 않다. 언론에 가끔 등장하는 것처럼 거액이 오갔다면 몰라도 세상사 무수한 주고받음에 뇌물, 선물로 명확한 선을 긋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뇌물을 뜻하는 영어 단어 ‘bribe’도 중세에는 선물이란 의미로도 쓰였다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선 촌지 떡값 전별금 같은 희한한 용어까지 생겼다. 뇌물이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링컨이 노예해방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파 의원 2명을 뇌물로 회유했던 게 대표적이다. 미 연방법원 판사였던 존 누난은 ‘뇌물의 역사’라는 책에서 링컨의 경우엔 뇌물을 줘선 안된다는 의무보다 더 중대한 도덕적 책무를 수행했다고 봤다. 미국에서는 한때 뇌물이 이런 식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양성화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래도 선물과 뇌물에는 차이가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게 선물이라면 뭐든 대가를 노리면 뇌물이란 구별법이 흔히 쓰인다. 망각과 기억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법도 있다. 일단 주고 나서 잊어버리면 선물이고 뭔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면 뇌물이다. 프랑스 사상가 자크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선물에는 부채의식이 없어야 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윤리경영가이드북의 구분법도 재미있다. 받고 나서 밤에 잠이 잘 오면 선물이고 그렇지 않으면 뇌물이란다. 그래서 공자는 견득사의(見得思義), 즉 얻은 것을 보면 옳은가를 생각하라고 했다.
설을 앞두고 ‘선물’을 배달하느라 택배회사들이 바쁘다. 그 중에는 말 그대로 선물도 있고, 뇌물도 있을 게다. 정치권에선 여야 모두 돈봉투 사건으로 어수선하다. 뭐가 됐든 주고받을 때 마음이 편치않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돈이 발언하면 다른 모든 것은 침묵한다’는 금언을 되새겨야 할 요즘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