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人스포츠]"내가 칼을 놓지 않는 이유", '세기의 검객' 김영호 인터뷰(上)

-사비 들여 펜싱클럽 운영...'펜싱 전도사'로 대중적 관심 높여한남동에 위치한 오피스텔 로비 층. 김영호(41,사진)는 해외스케줄과 지방출장을 제외하고 요즘 매일같이 이곳으로 출근한다. 방학기간 펜싱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특별반 수강생들을 챙기기 위해서다.

펜싱에 있어서 그는 '아시아 최초'란 수식어와 늘 함께한다. 그래서 일까. 알만한 사람들은 그를 '세기의 검객'이라고 부른다. 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2000년, 단 한차례도 아시아의 도전을 용납 치 않던 세계펜싱의 철옹성이 그의 손에 깨졌기 때문이다."저에게 펜싱은 자존심 입니다. 그 자존심 때문에 홀 어머님도, 가족도, 하물며 아내와 얘들까지도 잘 챙기지 못하고 살아왔거든요. 그런데도 금메달을 걸고 라커로 향하면서도 '해냈구나'라는 안도감 보다는 앞으로 내가 펜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또렷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때 생각한 게 한국 펜싱의 세계화 입니다."

김 감독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 코치에서 물러나 펜싱 보급과 교육컨설팅 사업을 통해 '펜싱 전도사'로 나섰다. 타고난 책임감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칼을 손에 쥐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세기의 검객' 김영호를 그가 운영중인 로러스 펜싱클럽에서 만났다.

▶"저 펜싱하고 싶어요." 촌놈, 펜싱을 만나다.김 감독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2남4녀 중 다섯째로 때어난 그는 유년시절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칼 싸움을 자주했다. 그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펜싱의 계기를 그때 그 '칼 싸움'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중학교 때 일인데 어느 날 학교에서 우연히 체육관 안에서 칼 싸움하는 형들을 보게 됐어요. 하얀 운동복에 투구를 쓰고 긴 칼을 쭉 찌르는데 '아 저거다' 싶었죠" 김 감독은 어려서부터 '칼 싸움'에는 자신 있었다. 누가 시켜만 준다면 잘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섰다.

당시 또래들 보다 달리기를 잘했던 김 감독은 학교(연산중)에서 육상부였다. 그 일이 있고 몇 일 후 육상코치를 찾아가 "저 펜싱 할래요"라고 얘기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당돌했죠. 매 맞아가며 정신력으로 운동하던 시절인데 지 맘대로 펜싱 부를 가겠다고 했으니. 볼기짝 좀 맞았죠(웃음)."운명적 만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펜싱을 시작하고 1년쯤 지났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한 여학생이 체육관에서 훈련 중이던 김 감독에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첫 사랑'이다." 김 감독의 눈에 든 그 여학생은 훈련차 방문한 인근학교 펜싱 팀 선수였다. 중학교 3학년 김영아 선수. 그녀가 바로 김 감독의 첫 사랑이자 배우자인 국가대표 출신 김영아 선수다.

"그 당시 하루 운동량이 엄청났거든요.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죠. 헌데 그 친구가 온 다음부터 운동을 엄청 열심히 했어요. 잘 보이려고 그랬는지 그때만큼은 힘들지 않더라고요(웃음)."

대표팀까지 같이 활동하던 아내는 1996년, 결혼과 함께 은퇴해 아들 동수(13)군과 딸 기연(11)양을 둔 두 아이의 엄마로 김 감독의 가장 큰 후원자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칼을 못 놓는 진짜 이유

김 감독은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학창시절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님은 행여나 아들 운동에 방해될까 그가 대표팀에 발탁돼 숙소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안부전화 조차 허락 치 않았다. 오로지 운동에만 전념하라고. 당시 그가 어머님께 전하는 유일한 근황은 대회 성적이 나가는 신문지상뿐이었다.

"시합 때 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했습니다. 오늘 성적이 좋아야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어머님이 아실 텐데 '무조건 1등 하자'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학창시절 어머님은 제가 나온 신문이며 잡지며, 대회 안내문 한 장까지도 꼼꼼히 모아 두셨더군요.”

묵묵히 지켜봐 주시던 어머님 공덕 일까. 김 감독은 세계선수권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결국, 2000년 시드니올림픽 펜싱 남자 플뢰레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 펜싱계를 발칵 뒤집어 놨다.

1896년 근대올림픽(그리스 아테네)이 처음 개최된 이래 펜싱 종목에서 아시아인에게 금메달을 내줬던 대회는 단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영광도 잠시, 그토록 원했던 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하자 김 감독은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방황 아닌 방황을 하게 됐다. 목표달성 후 찾아오는 우울증 같은 것이었는데 한 동안 칼을 놓고 지겨울 정도로 쉬어보기까지 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한 달이 지나자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어요. 한 가지 목표만 가지고 쉼 없이 달려온 탓에 목표의식이 흐릿해지면서 무기력해 진거죠." 당시만해도 명맥상 유지되던 '도시개발공사' 실업 팀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팀조차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더욱 컸다.

그는 다시, 무작정 칼을 움켜줬다. "무조건 체육관으로 향했습니다. 잡념을 없애고 또 다른 목표를 만들자는 생각에 운동에만 전념했죠." 김 감독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정리하며 지도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선수다, 지도자다, 뭐 그런 개념도 없었어요. 아시안게임 끝나고 바로 코치 자격으로 훈련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된 셈이죠. 펜싱이 원래 그래요. 한 가지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하기 위해서 적개는 2년, 많게는 4년까지 걸리거든요."

2년에 한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중간중간 세계선수권, 동아시아대회 등이 있으니 쉴 틈이 있겠냐는 게 김 감독의 설명이다.

다행히 금메달 이후 많은 사람들이 펜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별볼일 없는 코치였지만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생겨났어요. 새로운 중, 고등학교 팀들이 창단되고 대학 팀도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펜싱에 대한 인식이 바뀐 거죠. 펜싱하면 '김영호'로 통하는데, 그러다 보니 뭔지 모를 사명감에 잠도 안 오고 그랬다니까요(웃음)"

그는 펜싱을 위해 묵묵히 지켜봐 주시던 어머님, 동료이면서 선수의길 까지 포기하고 뒷바라지 해준 아내, 그리고 펜싱에 대한 사명감 하나로 오늘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고 있다. 그에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열정' 때문이었다. [계속] 한경닷컴 유정우 기자 see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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