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건설맨 '동네 훈장님'으로 인생2막

김영구 고일어린이집 한자 선생님
서울 고덕동에 있는 강동구립 고일어린이집. 지난 17일 아침 한 노인이 문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훈장님!” 하고 부르며 앞다퉈 뛰어나와 다리에 매달렸다. 아이들이 다리에 주렁주렁 매달리니 걸음은 더디지만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무료로 한자를 가르치는 김영구 씨(68). 건설회사에서 22년 일한 그는 퇴직 후 이곳에서 9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4년 서울 고덕동 성가정노인종합복지관의 소개로 이 어린이집과 인연을 맺은 뒤 강동구청 ‘노인일자리사업’의 지원을 받으며 1주일에 두 번씩 나와 한자를 가르친다. 노인일자리사업 지원자 가운데서도 10년 가까이 같은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강동구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씨는 1968년 극동건설에 입사, 사우디아라비아지사에 파견나갔고 1980년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로 이직해서는 리비아지사 팀장, 이라크지사 팀장 등을 지냈다. 1985년에는 건설회사 ‘세영주택’을 차려 사장으로 1990년까지 일했다. 중동의 모래폭풍 부는 거친 지역에서 12년을 보냈지만 그 기간에도 서예와 한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선비였던 할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어린 시절 한자와 가까워진 그는 서예 대회에도 수차례 나가 상을 받았다. 1970년 고향인 경남 김해에 있는 김해문화원 서예대전에서 특선을 했고 2006년에는 강동선사문화축제 서예전에서 입선했다. 현재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지도위원을 지내고 있다.실력파 훈장님은 아이들도 실력파로 길러내고 있다. 김씨는 지난달 26일 발표가 난 제53회 대한검정회 한자급수자격검정시험에 고일어린이집 6~7세 아동 40명을 응시하게 했고 이 가운데 35명을 합격시켰다. 특히 한자 100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준5급에 4명이 응시해 전원이 합격했다. 이는 미취학 아동임을 감안했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씨는 “취학 전 아동을 가르칠 때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일상과 한자를 연결시키면 아이들이 재미있어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고사성어 ‘일편단심(一片丹心)’을 가르친 날은 집에 가서 부모에게 “싸우지 말고 일편단심으로 사세요”라고 말하는 숙제를 내준다.

그러나 김씨 가르침의 백미는 실력 향상이 아닌 다른 데 있다. 한자를 가르치면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하는 효과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씨는 “한문은 뜻글자여서 배우는 사람이 심사숙고하고 인내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한자를 배운 이채원 어린이(7)의 어머니 김계향 씨(40)는 “예전에는 식사시간에도 계속 일어나서 돌아다녔는데 한자를 배운 뒤로는 다 먹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유교문화에서 강조하는 예절도 배울 수 있다. 김씨도 어린이집이 있는 고덕동에 사는 터라 길에서 제자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두 손을 배꼽에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 숙여 그에게 인사한다.

김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고일어린이집 꼬마들을 위해 계속 봉사활동을 할 생각”이라며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긍지와 보람을 끝까지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