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야생花ㆍ묘목 대중화한 종자명장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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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을 찾아서 - 장형태 대한종묘조경 대표전남 구례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10여분쯤 차를 타고 가면 도로변 논밭 사이로 제법 규모 있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대한종묘원’. 샛길로 500여 떨어진 지리산 자락에 비닐하우스 80여동과 사무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대한민국 종자명장 1호’ 장형태 대한종묘조경 (주)대표(59·사진)가 지난 35년간 ‘종묘 장인’의 꿈을 심어 결실을 맺어온 터전이다.
지난해 초 단국대에서 ‘문수조릿대의 보존생물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곳에서 과수묘목과 야생화를 키워오며 명예와 부를 일궈냈다. 국내 최초로 키위묘목 육종에 성공했고 단감과 매실 등의 과수묘목을 개발해 보급했다. 우리 고유의 야생화를 수집하고 재배에 나서 야생화 대중화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처음으로 ‘지피식물 가이드북’이란 도감도 펴냈다. 최근 이를 증면 보완해 발간한 ‘지피식물도감’은 조경업계 설계 용역의 기본 교재일 뿐 아니라 행정기관과 학교에서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2002년 노동부의 종자명장 1호, 기능한국인 29호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경북 영주가 고향인 그가 구례에 정착한 때는 1976년이다. 광주 상무대에서 군복무 중 출장을 다니다가 첫 눈에 반한 지역이 이곳이다. “토양이 충적토로 배수가 잘되고 기후가 온화해 농작물 성장에 최적지라는 매력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정착 후 한동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빚내서 키우던 강변의 묘목들이 홍수에 모두 휩쓸려 떠내려간 적도 여러 차례다. 그때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지만 묘목생산의 수입은 늘 신통치 않았다. 그에게 인생역전의 계기가 된 건 야생화였다. 그는 우리꽃 야생화를 수집하기 위해 지리산뿐 아니라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또 할미꽃 구절초 등 야생화 대량번식 기술도 개발했다. 문제는 수요였다. 당시만 해도 야생화가 생소하던 때여서 시장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 의욕적으로 야생화를 키웠지만 5~6년 동안은 또 ‘맨땅에 헤딩’해야 했다.“각종 전시회, 행사장, 지방자치단체 축제 등 기회만 있으면 야생화를 보냈습니다. 아파트 공사현장엔 야생화를 공짜로 심어주는 노력 끝에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해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죠.”
청계천 복원과 낙동강 한강 영산강 등 4대강 훼손지 복원에도 그의 자문과 함께 야생화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가 2001년 설립한 대한종묘조경(주) 대한종묘원은 전성기에 비해 일손이 달려 규모가 줄었지만 지금도 연 25억원의 매출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2대째 내려온 그의 사업은 1남2녀 중 막내 아들인 일웅 씨(30)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순천대 조경학과를 졸업한 뒤 대한종묘조경 과장으로 근무 중이며 자연하천 생태공원 골프장공사 등의 조경설계를 주로 맡아오고 있다.
그는 올해 구례IC 인근에 8년째 조성 중인 2만평 규모의 식물원 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농업 선진국들은 전 세계 식물자원을 수집, 신약개발 등에 활용하고 종자사업으로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당장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들 선진국에 의존해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겁니다.” 그가 식물종 보존과 육성을 위한 식물원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다.
구례=최성국 기자sk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