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넋을 잃은 관객들은 무대 뒤 고통을 알까…

에드가 드가 '오페라좌의 발레 공연'

돈 벌려고 손댄 발레그림…대중성 업고 큰 인기
거친 붓터치·파격적 구도, 화폭 곳곳 실험정신 충만…인상주의 대표 작가 '우뚝'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상주의 그룹의 주축 멤버 중 한 사람인 에드가 드가(1834~1917)는 허구한 날 발레리나만 그려댔다. 보다 못한 저명 화상 뒤랑 뤼엘이 그에게 “수집가들은 춤추는 소녀들만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사실 드가 자신도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동생 르네가 사업하다 파산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형으로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도 대중의 몰이해로 안 팔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시류에 영합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 발레의 중심지였다. 19세기 전반에 비해서 다소 열기가 식긴 했지만 발레는 여전히 상류층과 중산층의 고급스러운 여가활동의 하나임이 분명했다. 대중들이 발레에 열광한 것은 이것이 음악과 미술, 연극을 결합한 오감 만족의 종합예술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에 늘씬한 무용수들의 고혹적인 자태를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공개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숨길 수 없는 인기의 비결이었다. 영민한 지성의 소유자인 드가는 이런 발레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를 그린 화가는 없었다. 돈이 될 게 분명했다. 그가 자신의 발레 그림을 종종 ‘상품’이라고 얘기한 것은 자신의 착잡한 심사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발레를 상품으로 포장한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아무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연습과 공연 모습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해야 하는 등 이만저만한 품이 드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신분 상승을 바라는 하층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발레리나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은행가의 아들로 법과대학까지 나온 드가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무감만 아니었다면 그는 발레 그림을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가 발레리나들의 연습 장면을 관찰한 곳은 파리 오페라 광장의 중심에 위치한 국립 파리 오페라좌, 일명 가르니에 극장이었다. 제2제정기(1852~1870) 파리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망 남작의 명에 따라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1825~1898)가 설계한 이 극장은 1875년 문을 열었다. 화려한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된 이 극장은 노트르담 성당과 함께 단숨에 파리의 명물이 됐다. 특히 이곳은 쥘 페로 같은 당대 최고의 안무가가 발레리나 지망생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세의 등용문이나 다름없었다.

드가는 발레 연습실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혹독한 연습에 시달리는 발레리나의 고통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고 그 모습을 생생히 기록했다. 돈이 궁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드가가 화가로서의 자존심마저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상주의자 그룹에 가담하면서 실험을 거듭해온 새로운 화법을 발레리나를 그릴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드가는 인상주의자들과 어울리긴 했지만 그들과는 다른 재현의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모네와 르누아르, 피사로가 자연광 아래 펼쳐지는 대자연의 순간적 인상을 야외에서 포착한 데 비해 드가는 실내에서 펼쳐지는 도시민의 삶에 주목, 실내 작업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 역시 빛의 요소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고 실내조명 아래 춤추는 대상의 순간적 느낌을 화폭에 담았다.

1877년에 그린 ‘오페라좌의 발레 공연’은 새롭게 장안의 명소가 된 가르니에 극장의 공연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파노라마 사진처럼 가로로 긴 화폭에 담긴 가르니에 극장의 실내 풍경은 차분한 붓질과 안정된 구도를 중시한 아카데미 계열의 화가들을 경악시키고도 남을 만큼 새로운 시도들로 충만해 있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는 오른쪽의 정지 동작의 발레리나들과 왼쪽의 한창 연기를 펼치고 있는 세 무용수로 나눠진다. 왼편의 무용수 중 프리마돈나로 보이는 앞쪽의 발레리나는 양 팔을 타원형으로 모으고 다리를 쭉 편 채 발을 수직으로 세우는 제5포지션(발레의 기본 5동작 중 하나)을 취하고 있다. 뒷모습만 보이는 ‘튀튀’ 발레복 차림의 발레리나들은 백조의 뒷모습을 연상케 한다.

감상자를 당혹케 하는 것은 바로 무대 아래쪽에서 발레리나의 연기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의 잘린 머리다. 마치 실수로 잘못 찍힌 스냅 사진을 연상케 하는 이 ‘만행’에 가까운 구도는 드가가 즐겨 사용한 표현 방식으로 당대 한창 인기를 끌었던 에도시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오른쪽의 윗부분만 드러난 현악기는 이 그림이 오케스트라의 위치에서 그려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빛의 효과도 남다르다. 앞쪽 무용수의 발레복은 빛을 받아 다리와 같은 색으로 그려졌다. 흰색의 발레복도 조명을 받아 누런색으로 묘사됐다. 붓의 터치 역시 형태에 집착하기보다는 순간적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빠르고 거칠게 내달은 모습이다. 결국 화가는 자신의 새로운 회화적 실험을 위해 발레 공연을 일종의 제물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화상 뒤랑 뤼엘이 말한 대로 후대의 수집가들은 드가의 작품 중 춤추는 소녀들만을 주로 기억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발레리나들을 매개로 개성적인 화법을 창시한 드가라는 작가를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그 점은 충분히 입증됐다. 뒤랑 뤼엘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던 것이다.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라벨의 발레곡 '볼레로'

“라벨은 미쳤어.” 객석에서 ‘볼레로’를 듣고 있던 한 여성이 소리쳤다. 이 말을 전해들은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은 미소를 머금은 채 “흠, 그는 내 음악을 제대로 이해했군”이라고 받아쳤다. 라벨의 볼레로가 초연됐을 때 항간에 떠돌던 유명한 에피소드다.

이 음악은 라벨의 마지막 발레곡으로 러시아 출신의 명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1885~1960)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것이다. 루빈슈타인은 그에게 스페인 작곡가인 이삭 알베니스의 ‘이베리아 모음곡’ 중 6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라벨은 볼레로라는 스페인 춤곡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라벨은 오케스트라들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길 꺼릴 것이라고 조바심을 냈지만 1928년 파리 오페라좌(가르니에 극장)에서 이뤄진 초연은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볼레로’는 타악기와 현악기로 이뤄진 두 개의 멜로디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오케스트라의 관악기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구조로 이뤄져 그 전체적 인상이 마치 재즈 앙상블이 펼치는 개별 즉흥 연주(임프로비제이션)를 떠올리게 한다. 도입부에서 들릴 듯 말 듯하던 기본 멜로디는 뒤로 갈수록 악기가 하나씩 더해지면서 점점 그 소리가 커지고 비트도 강화돼 청중의 감정을 극도로 고조시킨다.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이 음악이 끝날 때쯤 당신은 아마도 짜릿한 쾌감에 젖어 있으리라.

▶QR코드를 찍으면 명화와 명곡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