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동대문 장사꾼이 어떻게 'Mr. 피자'에 빠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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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꾼이다정우현 미스터피자 회장(64)은 자칭 ‘꾼’이다. 초등학교까지 나무꾼, 농사꾼이었고, 대학 졸업까지 10년간은 싸움꾼에, 여학생 낚시꾼이었다. ROTC 출신 소대장 시절의 술꾼, 노래꾼, 승부꾼으로, 동대문에서 15년 장사꾼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한다. “나는 피자꾼이다.”
정우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76쪽 / 1만3000원
사훈은 "신발을 정리하자"…20년 만에 日 원조까지 접수
정 회장은 미스터피자 호의 키를 잡고 있는 선장이다. 미스터피자는 국내 피자업계 1등 기업. 전국 400여개 매장과 중국, 미국, 베트남 등 해외 27개 매장을 운영한다. 이탈리안 홈메이드 뷔페 레스토랑 제시카키친과 수제머핀 커피전문점 마노핀이 패밀리 브랜드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미스터피자를 한국 1등 피자 브랜드로 키웠을까. 정 회장이 《나는 꾼이다》(위즈덤하우스)를 통해 자기 얘기를 했다. 미스터피자 창업과 세계화까지 남다른 성공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다. 그가 세상을 읽고 사람을 대하며, 결정하고 추진했던 순간들은 인생과 경영의 모범으로 새길 만하다.
그는 동대문 평화시장의 거상이었다. 1974년 제대 후 15년간 처가에서 운영하던 섬유도매업체 천일상사를 맡아 연매출 100억원대로 키웠다. 1989년 미스터피자를 만났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늪에 빠진 섬유산업 대신 외식업에서 사업 기회를 찾던 참이었다. 그는 사업설명회를 하려던 재일교포 3세 호소카와 요시키 미스터피자재팬 사장을 찾아 이렇게 말했다. “피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말미를 달라. 결심이 설 때까지 다른 후보자와 상담을 보류해 달라.”
그걸로 됐다. 한국에서는 한국 미스터피자 상표로 등록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합의도 이끌어냈다. 1년 뒤인 1990년 9월12일 원래 목욕탕으로 설계된 건물의 구조를 변경해가며 이대 1호점을 열었다. ‘300% 원칙’에 충실했다. 100% 수타피자, 100% 홈메이드 피자, 100% 석쇠구이 피자임을 내세우며 군웅할거의 피자시장을 정면 돌파했다. 1996년 미스터피자재팬으로부터 판권을 사들여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에 상표등록을 했다. 1999년 대학로에 100호점을 냈고, 2008년 서귀포에 350호점을 내면서 매장수 1위가 됐다. 이듬해 매출에서도 업계 1위로 올라섰다. 마침내 2010년 9월, 1호점을 낸 지 20년 만에 일본 상표권까지 얻으며 원조를 삼켜버렸다.정 회장은 미스터피자의 이런 성공의 원동력으로 동대문시장 경험을 꼽는다. 그는 사람을 중시했다. 천일상사를 맡고 점원들을 ‘주인’으로 대우했다. ‘퇴직금 지급 점포’란 휘호를 써서 매장 한가운데에 걸었다. 점원에게는 월급이란 게 없었던 당시 동대문시장이 다 뒤집힐 일이었다. 자기 점원들을 믿지 못해 화장실도 맘대로 가지 못하던 때였다. 그는 “조건 없이 내가 믿겠다고 선언하니 세상이 비로소 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거래처와의 관계도 ‘믿음’으로 다졌다. 돈은 받아야 할 사람이 말을 하기 전에 내줬고, 아예 알아서 가져가라며 돈통을 내주기도 했다. “작은 장사꾼은 돈을 벌지만 큰 장사꾼은 길을 튼다”는 가르침의 실천이었다.
경영과 사람에 대한 정 회장의 이런 시선은 미스터피자 사훈에서도 드러난다. 엄계 1위가 된 뒤 사내공모로 지은 사훈 ‘신발을 정리하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서비스를 하겠다는 창업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2009년 말 채택한 매장 인삿말 ‘온 에어(On Air)’, 즉 ‘생방송 정신’도 같은 맥락이다.
정 회장은 “한계는 더 높은 차원으로 오르기 위한 계단”이라며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은 시작할 때부터 성공 그 자체를 생각하고 긍정의 씨앗을 움틔운다”며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내면을 지속적으로 단련시켜 스스로를 돕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조언한다.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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