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英 프리미어리그 vs 日 본인방

오형규 논설위원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에는 선수, 감독, 구단주의 국적에 제한이 없다. 주전 모두를 외국 선수로 짤 수도 있다. 이번 시즌 20개 팀에서 그라운드를 밟아본 선수가 488명인데, 국적은 무려 66개국에 이른다. 강등권(하위 3팀) 탈출 싸움은 선두경쟁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이런 개방과 경쟁 시스템이 EPL을 212개국, 6억가구가 시청하는 세계 최고 리그로 만들었다.

66개국 선수가 뛰는 최고리그일본에는 기성(碁聖) 명인(名人) 본인방(本因坊)이란 3대 기전이 있다. 조치훈이 90년대 본인방을 10연패했고, 대삼관(3대 기전 그랜드슬램)을 네 번이나 이뤄 국내 바둑팬에게도 친숙하다. 3위 기전인 본인방도 우승상금이 약 5억원에 달해 웬만한 세계기전의 두 배다. 하지만 일본 바깥에선 잊혀진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 일본기원 소속기사들만 참가를 허용하는 폐쇄성 탓이다. 우물안 일본 기사들은 세계랭킹 50위 안에 단 한 명(32위)만 남았다.

영국과 일본은 대륙에 면한 섬나라여서 공통점이 많지만 국기(國技)를 세계화하는 데에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80년대 몰락하던 노(老)제국 영국은 경쟁을 수용해 부활한 반면, 80년대 욱일승천했던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 신음하는 처지임을 EPL과 본인방이 극명하게 상징한다. 평평해진 세상에서 경쟁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머리만 처박으면 숨었다고 믿는 타조들을 위한 무대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점점 타조들이 판친다.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피곤한 경쟁을 안 하게 해주겠다고 경쟁들이다. 남 탓, 사회 탓으로 돌리면 표가 온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MB정부와 한나라당은 공생·공정이란 미명 아래 경쟁을 천하고 탐욕스런 것으로 몰아가고,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은 ‘개방=악(惡)’으로 호도한다. 그럴수록 손해보는 것은 국민이요, 재미보는 측은 독과점적 지대(地代)를 누려온 집단들이다.KTX를 민간과 경쟁시켜 요금을 20% 낮추겠다는 국토부 방침에 코레일이 재벌 특혜라며 결사반대한다. 이에 맞장구쳐 제동을 건 게 한나라당이다. 하지만 철도요금을 들여다보면 어처구니 없다. 새마을호는 서울~부산 간 5시간 걸려 무궁화호보다 불과 20분 빠르면서 요금은 약 4만원으로 1만3000원이나 비싸다. 느리고 비싼 새마을호의 구조조정을 외면하고 KTX 독점이익으로 적자를 메우는 게 현실이다. 한나라당이 강령에서 그토록 ‘국민’을 되뇌이면서도 요금이 싸지는 것은 외면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야 수뇌부가 일반약의 약국 외 판매는 없을 것이라며 약사회에 머리를 조아리는 꼴은 정말이지 가관이다. 그들의 안중에는 표 말고 뭐가 더 보이는지 궁금하다. 또한 로스쿨 졸업생이 쏟아져 변호사 몸값이 떨어진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개탄스럽다. 변호사들의 경쟁 속에 법률서비스가 저렴해지는 게 도대체 뭐가 걱정할 일인가.

경쟁·개방 막으면 담합·특혜뿐한국 사회가 저성장, 양극화, 세대갈등, 일자리 덫에 빠져 위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집단적인 경쟁회피와 개방회피 증후군에 빠진 데 있다. EPL이 그렇듯 개그콘서트의 인기도 “못 웃기면 다음주에 못 나온다”는 치열한 경쟁에서 나온다. 낙오자가 나올까봐 경쟁을 막으면 그 덕에 퇴출을 면한 소수와 독과점 집단을 뺀 모두에게 손해다. 경쟁과 개방이 막힌 곳에는 담합과 정실, ‘빽’과 특혜가 자리를 꿰찰 뿐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