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가 경영자로 변신…18년 연속 흑자·매출 20배

독일 프로축구단 '바이에른 뮌헨' 울리 회네스 회장

스포츠 경영 신기원 '골인'
1975년 프랑스 파리 파크데프링스 경기장. 유럽 클럽축구 챔피언을 정하는 독일 바이에른 뮌헨과 잉글랜드 리즈 유나이티드 간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반 42분 ‘뚝!…’ 소리와 함께 그라운드를 질주하던 바이에른의 미드필더 울리 회네스가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24살 창창한 나이에 선수생명을 접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은 ‘빼어난’ 축구 경영인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더 이상 경기장에 설 수 없는 부상은 회네스가 ‘스포츠 경영’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다. 1979년부터 바이에른 뮌헨 경영에 참여한 그는 구단을 18년 연속 흑자구단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2009년 바이에른 뮌헨 회장에 올랐다. ◆유럽 최고 ‘알짜구단’

최근 영국의 브랜드컨설팅업체 브랜드파이넌스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바이에른 뮌헨의 브랜드가치는 3억800만파운드(약 5400억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4억1200만파운드), 레알 마드리드(4억100만파운드), FC바르셀로나(3억9200만파운드)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첼시, 아스널, AC밀란, 인테르밀란 등 슈퍼스타들이 즐비한 클럽들보다 구단가치를 더 높게 평가받은 것이다. 지난해 매출은 3억2300만유로(약 4800억원), 보유 현금은 1억3000만유로(약 1900억원)에 이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바르셀로나 등 대부분의 ‘빅 클럽’들이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바이에른은 18년 연속 흑자를 기록 중이다. 2010~2011 시즌에도 130만유로의 이익을 냈다. 2009~2010시즌(290만유로)에 비해선 이익 규모가 줄었다. 하지만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를 감안하면 탄탄한 수익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경기장 입장수입뿐 아니라 방송 수입과 경기장 광고 등에 따른 수입 등 탄탄한 수입구조를 갖춘 덕분이다. 독일 프로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가 영국이나 스페인 리그에 비해 이름값은 떨어지지만, 연봉 거품을 없앤 ‘실력파’ 알짜배기들로 선수단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흑자운영에 한몫했다.◆비운의 스타, ‘구세주’로 영입되다

이런 바이에른의 경영 성과를 일군 인물이 회네스 회장이다. 적자의 늪과 끝없는 침체에서 구단을 구해낸 것이다.

1979년 27세의 회네스는 분데스리가 소속 구단 역사상 최연소 이사에 임명됐다. 당시 바이에른이 구단 창립 이래 최대의 경영 위기를 겪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이에른의 전성기는 1970년대 초·중반이었다. 프란츠 베켄바워를 중심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를 한 것도 이때다. 그러나 1975년 우승 후 급격히 팀은 쇠락해갔다. 유럽축구 무대 정상을 한 번도 밟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분데스리가에서도 보루시아뮌헨글라드바흐, 함부르크SV 등에 챔피언 자리를 내줬다. 팀은 750만마르크에 달하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비라도 오면 경기장 관중은 수천 명 수준으로 줄어 경기장이 텅텅 비었다. 구단 수입의 85%를 티켓 판매에 의존하고 있던 때라 타격은 더 컸다. 당시 바이에른 회장이었던 빌헬름 노이데커는 ‘위기 해결’을 위한 대책의 하나로 비운의 스타 회네스를 영입했다. 그는 팀 서포터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바이에른 전성기 시절 인물 중 유일하게 현역이 아니었다. 경영진에 들어올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선수시절 100m를 11초에 주파해 ‘유럽에서 가장 빠른 공격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당대 최고의 공격수 게르트 뮐러와 짝을 이뤄 한 시즌(1973년) 53골을 합작하기도 했다. 구단은 회네스가 축구장에서처럼 기존 경영진과 호흡을 맞춰 정상화에 기여해주길 원했다.

◆‘천수답’을 ‘화수분’으로

회네스가 이사진에 들어간 뒤 처음 한 일은 수입원(源) 다변화였다. 그는 뮌헨 지방의 트럭 제조업체인 마기루스도이츠와 180만마르크 규모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회네스는 구단을 위해 인센티브도 포기했다. 독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스폰서 계약 커미션으로 매달 1만마르크와 각종 광고 계약금의 절반을 내몫으로 합법적으로 챙길 수 있었지만, 회사를 살리자는 생각에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회네스는 또 미국식 스포츠 마케팅 기법을 유럽 축구계에 들여왔다. 이사가 된 직후 미국으로 날아가 미국 프로야구단과 농구단, 미식축구 구단들의 수익구조를 파악했다. 그는 “바이에른이 엽서 쪼가리나 팔던 조그만 매장만 갖추고 있던 시절, 미국 스포츠 구단들은 구단 전용숍에서 티셔츠와 스카프, 모자, 가방을 팔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배운 것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 바이에른 유니폼을 비롯해 구단 로고가 들어간 제품을 파는 스포츠 용품 전용매장을 마련한 것. 요즘은 어느 구단이나 다 하는 유럽 축구팀의 티셔츠 판매 문화를 회네스가 도입한 것이다.

1980년대 스포츠 중계를 눈여겨본 회네스는 TV중계권료와 스폰서 확대에 나섰다. 회네스는 구단의 주 수입원을 티켓 판매에서 TV 중계권과 스폰서십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회네스는 “어린 시절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뿌린 각종 인쇄물과 미국 방송물을 통해 광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며 “당시 스포츠업계는 티켓 판매 외의 다른 수입원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스포츠가 훌륭한 광고의 장이 된다고 생각하니 수입원이 끝없이 늘었다”고 회고했다.

현재 바이에른은 메인 스폰서인 도이체텔레콤으로부터 연간 2000만유로를 지원받고 있다. 또 각종 상품 판매로 연간 4400만유로의 수입을 거두고 있다. 티켓 판매 수입에 대한 의존도는 전체 매출의 15~20% 선으로 떨어졌다.

구단 재정 상황이 좋아지자 바이에른의 팀 성적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바이에른은 2년에 한 번꼴로 분데스리가를 제패했다. 유럽 무대에서도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준우승 4회 등 성적을 이어갔다. 회네스가 재직한 33년간 바이에른의 매출은 20배 이상 증가했다. 팬클럽에 등록한 회원 수도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축구 구단중 세계 2위 수준이다. 회사를 회생시키고 선순환 궤도에 올려놓은 회네스는 2009년 영업이사직을 떠나 구단 회장직을 맡았다.

◆‘따뜻한 경영자’

1982년 하노버 인근에서 경(輕)비행기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가 회네스였다. 이 사고 이후 그는 더욱 성숙해졌다. 은퇴 후 진로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선수들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부도위기에 처했던 라이벌 구단 보루시아도르트문트에 200만유로를 빌려주는 등 어려운 상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강한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최근 독일축구협회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결코 노스텔지어(회고)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 벌어질 일만 생각하기도 벅차다”며 “할 수 있다면 적어도 64세 때까지는 회장으로 연임하고 싶다”는 의욕을 내비치기도 했다.

실제 그는 형과 함께 뉘른베르크에 있는 소시지 공장을 공동 운영하는 등 축구 경영자 못지않게 개인적인 사업가로서도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독일에서는 ‘소시지 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독일의 대형 유통체인 알디 등에 최대의 소시지 공급자이며, 맥도날드와 손잡고 독일식 소시지를 끼운 버거인 ‘뉘른베르거’란 현지 특화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바이에른 선수단과 스태프가 매일 먹는 식단에도 뉘른베르크 공장에서 만든 소시지가 오른다.

독일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는 회네스가 60세 생일을 맞은 지난 1월 특별판 기사에서 “회네스는 선수시절 1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경영자가 된 이후엔 40회 이상 우승의 기쁨을 맛볼 정도로 경영자 시절이 더욱 빛난다”며 “운동선수에서 경영자로 변신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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