쩡쩡한 대사…꽉찬 무대…70~80대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

이순재 연극 '아버지'서 열연
박근형·백성희는 '3월의 눈'서
서 있기만 해도 무대를 꽉 채우는 존재감. 묵직한 대사는 깊은 울림을 전하고, 연기는 일상처럼 자연스럽다. 긴 호흡과 침묵마저 예술로 승화시키는 배우들. 70~80대의 나이에도 연기 열정을 불태우는 노배우들의 무대가 잇따라 마련된다.

3월1~18일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3월의 눈’(연출 손진책). 20년 만에 연극무대로 돌아온 박근형 씨(72)와 현역 최고령 배우인 백성희 씨(87)가 장오·이순 역을 맡아 부부로 호흡을 맞춘다.‘3월의 눈’은 재개발 열풍에 떠밀려 평생 살아온 낡은 한옥을 떠나야 하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린 작품. 지난해 3월 국립극단 두 원로배우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작으로 공연돼 큰 호평을 얻었다.

박씨의 출연은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백씨의 전화 한 통으로 이뤄졌다. 장민호 씨(88)가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박씨를 적임자로 떠올린 것. 두 사람은 연극 ‘만선’(1964) ‘갈매기’(1966) 등에 함께 출연하며 1960년대 국립극단을 이끌었다. 박씨는 “어머니가 전화를 주셔서 ‘하겠습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했다”며 “연극을 하면서 제일 존경하는 ‘백성희 어머니’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1992년 연극 ‘두 남자 두 여자’ 이후 TV와 영화에서 주로 활동한 박씨는 “연극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지만 한번 연극계를 나와 다른 일을 하다 보니 돌아오는 게 쉽지 않았다”며 “연습실을 오가는 동안 대사라도 많이 봐야겠다 싶어 전철로 출퇴근한다”고 했다.그는 “어머니만큼 연극계에 남아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며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지면 모든 걸 털고 나설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형 백성희 커플과 오영수 박혜진 커플이 번갈아 연기한다.

이순재 씨(77)와 전무송 씨(71)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번안한 연극 ‘아버지’에서 아버지 장재민(원작의 윌리) 역을 맡았다.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연출가 김명곤 씨(60)가 번안한 ‘아버지’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이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오늘날 한국으로 가져와 청년실업과 노년실업, 가족해체에 대한 물음을 사회에 던진다.

김씨는 “수많은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여전하고 작품의 주요 갈등 축인 자식들과의 이야기도 한국사회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이씨는 두 번, 전씨는 네 번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를 연기했다. 1979년과 2000년 이 작품에 출연한 이씨는 “처음엔 ‘달이 아파트 사이로 가고 있구만’이라는 단순한 표현이 그냥 흘러가는 대사인 줄 알았다”며 “2000년에야 콘크리트로 덮여가는 도시화에 대한 경고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명작은 명작이다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며 “명작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공통의 인식과 가치관을 발견하게 한다”고 했다.

전씨는 “지금까지는 저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제가 ‘딴따라’가 된 것에 한을 갖고 계셨던 아버님을 생각하며 무대에 올랐다”며 “이번에는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해 생각하면서 무대를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연극 ‘아버지’는 오는 4월6~7일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개막해 같은 달 13~29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무대로 옮겨온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