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부근 삼성전자 사장 '울릉도 촌놈' 이야기…29.9㎜ TV 못만든다 할때 저질렀다

인사이드 Story
간절히 원했던 의대 낙방때 쫄지않고…좌천된 해외 신생법인에서 들이댔고

수산高 자퇴…고교만 5년 다녀
입사하자마자 기피부서에 배치
동기 중에서 맨 꼴찌로 승진

"그래도 난 지금 삼성전자 사장"
‘입시에 낙방하고 고교를 5년 다닌 남자, 의사를 꿈꾸다 떨어져 공대에 간 남자, 입사하자마자 기피 부서에 발령난 남자, 끗발 있는 부서에서 인도네시아 신설법인으로 좌천된 남자, 동기 중 맨 마지막으로 승진하던 남자.’

억세게 운 나쁘던 이 남자는 글로벌기업 삼성전자의 사장이 됐다. 삼성TV를 6년째 세계 1위로 일으켜 세운 윤부근 소비자가전(CE) 담당 사장(59·사진)이다.윤 사장은 지난달 29일 부산KBS에서 열린 ‘열정락서2’ 토크 콘서트에서 ‘울릉도 촌놈이 마음으로 전하는 이야기’란 주제로 자신의 삶을 대학생들에게 들려줬다. 열정락서2는 삼성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전국 순회 토크 콘서트다.

삼성전자 ‘넘버 3’ 사장이 된 그는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남들과 달랐던 점은 “쫄지않고, 들이대고, 저질렀다”고 했다.

울릉도에서 태어난 윤 사장은 도내 울릉중을 나왔다. 대구에 있는 한 고교 입시에 도전했다 보기 좋게 낙방하고 울릉수산고에 들어갔다. “울릉수산고 2학년을 마치고 보니 이대로 졸업하면 평생 배를 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꿈인 난치병을 고치는 의사가 돼보겠다고 무작정 대구로 갔다. 두 달간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책을 봤다. 앉아서 자다 보니 발이 부어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그렇게 다시 대구 대륜고 1학년에 진학했다. 고교만 5년을 다녔다.”

원했던 의대에도 떨어졌다. 한양대 공대를 나온 뒤 1979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통신분야에서 일하길 원했지만 삼성과 미국 통신사와의 합작이 깨지는 바람에 TV사업부에 배치됐다.

“당시 TV는 미국식(NTSC)과 유럽식(PAL)으로 나눠져 있었다. 수출로 호황을 누리던 북미식이 아닌 유럽식 컬러TV 개발이 나의 몫이었다. 밥 먹듯 밤을 새우며 매달렸다. 울릉도에서 태어나 유달리 눈이 좋았는데 복잡한 TV 회로도를 그리다 안경까지 썼다.”과장 때는 상사와 맞지 않아 사표를 내기도 했다. 잘 나가던 개발팀 부장이었던 때, 갑작스레 인도네시아 신설법인 태스크포스(TF)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좌천됐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의 아내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러 학원에 다녔다.

윤 사장은 그 모든 어려움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주어진 환경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했다.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결과가 좋게 나온다.”

그때부터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다. 5년간의 해외 근무가 끝나고 본사에서 경영혁신을 맡았다. 평생 읽은 책보다 더 많은 책을 숙독하며 업무에 매달렸다. 어렵다던 외환위기 때인 1999년 샐러리맨의 꿈인 별(임원)을 달았다. 개발업무뿐 아니라 해외에서 법인을 운영해본 그는 사업을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2006년 포도주잔을 닮은 보르도 TV를 히트시키며 삼성 TV를 세계 1위에 올려 놓은 주역이 됐다. 35년간 1위였던 일본 소니를 꺾었다. 2009년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땐 기존 제품보다 100만원 비싼 LED(발광다이오드) TV를 내놨다. 모두가 안될 거라고 했다. 10㎝가 넘던 두께를 29.9㎜로 줄인 LED TV로 삼성은 그 해 TV사업 사상 가장 많은 돈을 쓸어담았다.

윤 사장은 “당시 29.9㎜는 아무도 못 만든다고 했다. 개발팀에서 최종적으로 4㎝까지 만들 수 있다고 들고 왔는데, 앞에 3자가 들어가도 안된다고 몇 번이나 잘랐다”고 말했다.

“마음속에 한계를 두지마라. 한계란 단어를 맘에 두면 도망가거나 핑계를 대게 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저질러라. 그리고 들이대라. 한계에 부딪혔을 때 시작하는 게 도전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강당을 메운 3500명 대학생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부산=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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