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사 책임에 대한 국민연금의 잘못된 판단

개정된 상법을 정관에 반영하려는 상장사들의 노력을 국민연금이 무산시킨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이사의 책임을 경감시킨 개정 상법은 바로 다음달 15일부터 시행되기 때문에 기업들로선 이번 정기주총에서 정관을 고쳐야 한다. 많은 기업들이 국민연금의 처사에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다.

회사에 대한 이사의 책임을 규정한 400조 2항에서 1년간 보수의 6배(사외이사는 3배)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선 책임을 면제할 수 있게 허용한 것이 개정상법의 골자다. 유능한 경영인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일하게 하자는 입법 취지다. 물론 이 조항에는 이사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회사에 손해를 발생시켰거나 회사의 기회와 자산을 유용하는 경우, 그리고 이사가 자기자신과 거래하는 경우는 면책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더구나 개정 상법은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준법감시인까지 두도록 의무화하고 있다.문제의 조항은 전체적으로 이사의 책임을 확대하면서 일부 제한적으로 숨통을 터준 것뿐이다. 국민연금은 이 조항이 주주이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상법 개정의 취지에 어긋나는 의결권 행사라고밖에 볼 수 없다. 더욱이 국민연금은 이번에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의결도 거치지 않았다. 상법이 작년 4월14일에 개정됐던 점을 감안하면 그동안 뭘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개별 주주라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사에 더 무거운 책임을 지우는 표결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일반주주가 아니라 국민의 대리인이다. 국민의 총의를 따로 모을 수 없다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만든 법의 취지를 존중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아도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국민연금이 대리인의 권력을 무한 확장하겠다는 최근 현상은 실로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