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냄새 진동하는 된장찌개에 열광…레시피 표준화? 맛 없어지는 지름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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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 뉴요커 사로잡은 한인 셰프들의 군침도는 '한식학개론'전 세계 외식산업의 중심지 뉴욕.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이 도시의 요리사들은 역설적이게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돈을 받고 일한다. 직업 요리사라면 누구나 뉴욕에서 일하고 싶어해 늘 인력공급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화려한 ‘파인 다이닝(fine dining·최고급 레스토랑)’ 세계의 이면에는 이들 요리사의 숨막히는 경쟁과 하루 16시간씩 이어지는 강행군이 숨어 있다.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FCI(French Culinary Institute) 등 유명 요리학교를 나와 ‘셰프들의 전쟁터’인 뉴욕 외식 업계에 용감히 뛰어든 ‘한식 세계화 1세대’들이다. 뉴욕 최정상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4명의 한국인 요리사들을 만나 뉴욕에서 셰프로 살아가는 법, 그리고 한식 세계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뉴욕의 주방엔 비밀이 없다
비법 전수해야 요리가 발전한다고 생각
노트 안 가져오면 오히려 호통
'셰프들의 전쟁터'서 살아남기
체력·실력·눈치 3박자…하루 16시간 강행군
'미슐랭 3스타 식당' 한인 셰프 없는곳 없어
▶사회(유창재 특파원)=왜 모든 요리사들이 뉴욕에서 일하고 싶어하나.▷심성철 셰프=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식당에서 일해봤지만 한국 요리사들은 절대로 자신의 레시피를 후배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뉴욕의 요리사들은 레시피를 모두 공개한다. 후배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요리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종훈 셰프=동의한다. CIA 재학시절 뉴욕 포시즌호텔의 식당에서 인턴으로 일했는데 셰프가 키친에 노트를 가지고 오라고 하더라. 한국의 정서로는 돈을 받고 일하면서 노트에 뭔가를 적는 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하루는 셰프가 “왜 노트를 가지고 오지 않느냐”며 화를 내더라. “제발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카피하고 가져가라”고 하더라. 맨해튼이 단기간에 외식산업의 중심이 된 건 그런 공유의 문화 때문인 것 같다.
▷임수길 셰프=우수하고 다양한 식당이 많기 때문에 기회가 많은 것도 뉴욕의 매력이다. 서울에서는 미술 하는 사람들이 평생 가야 피카소 그림을 한두 번 볼까 말까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매일 볼 수 있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최고가 모두 뉴욕에 모여 있기 때문에 보고 배울 수 있는 게 많다.▷김훈이 셰프=경쟁적인 환경도 매력이다. 전 세계의 성공한 셰프들은 모두 뉴욕에 온다. 하지만 뉴욕에서 성공한 셰프들은 다른 도시에는 잘 가지 않는다. 뉴욕에서 성공했으면 더 이상 도전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최고 요리사라는 알랭 뒤카스나 조엘 로브숑도 뉴욕에서는 실패했다. 그래서 나는 요리사들을 고용할 때 뉴욕에서 일한 경험이 없으면 뽑지 않는다.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씩 서서 일하는 뉴욕에서의 경험이 없으면 힘든 주방 일을 잘 견뎌내지 못한다.
▶사회=그런 경쟁적인 환경이라면 왠지 한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낼 것 같다.
▷원 셰프=그렇다. 경쟁하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눈치가 빠르고 윗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미국인 요리사 10명을 데려와도 한국인 요리사 한 명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뉴욕의 웬만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는 이제 한국인 셰프가 없는 곳이 없다.▶사회=최정상급 레스토랑에 한인 셰프들이 늘어나면 한식 세계화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심 셰프=내가 일했던 ‘퍼세’는 매일 메뉴를 바꾼다. 그러다 보니 셰프들이 각자 자신의 의견을 메뉴에 반영하려고 경쟁한다. 나는 아무래도 한식이 나의 경쟁력이기 때문에 한식을 자주 내세운다. 예를 들어 육수에 간장과 고추, 꿀을 넣고 조려 ‘코리아네즈(코리안+마요네즈)’라는 이름의 소스를 만들어 내놓은 적이 있다.
▷임 셰프=최근 들어 ‘다니엘’ 셰프들도 한식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얼마 전에 한국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구매했다. 수석주방장(chef de cusine)이 나에게 김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사회=페이스트리 셰프도 디저트에 한식의 요소를 가미할 수 있나.
▷원 셰프=정식당의 경우 한식을 ‘파인다이닝’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다. 인삼이나 쑥, 흑초, 우엉과 같은 한국 재료들을 이용해 한국의 맛이 살아 있는 디저트를 만들고 있다.
▶사회=뉴욕에서 느끼는 한식 세계화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해달라.
▷김 셰프=한국 정부에서 돈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처럼 이제 고숙련 인재들이 뉴욕에서 한식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뉴욕 한식당들의 문제는 첫째 주인이 셰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뉴욕의 최고급 레스토랑들은 퍼세의 토머스 켈러, 다니엘의 다니엘 불뤼드 모두 오너 셰프가 운영한다. 내가 단지를 열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프랑스 셰프들의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는데 이들을 데려갈 만한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였다. 둘째로 미국인들을 끌기 위해서 한식을 변형한 게 문제였다. 우리 장모님께서 단지의 김치를 담가주시는데 처음에 미국인들이 싫어할까봐 젓갈과 마늘을 안 넣으시더라. 그래서 내가 많이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뉴욕의 진짜 미식가들은 냄새 나는 시골 된장찌개에 열광한다.
▷원 셰프=한식 세계화는 이미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식을 매뉴얼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던데 난 반대다. 과거에 과일 아이스크림을 만들면서 1주일 동안 계량을 해서 레시피를 만들었더니 선배 셰프가 절대 쓰지 말라고 하더라. 과일은 매번 당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김치에 쓰이는 배추도 마찬가지다. 염도를 표준화할 수 없는 이유다. 역시 ‘적당히’가 한식의 살아 있는 레시피다.
▶사회=뉴욕에서의 셰프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달라.▷임 셰프=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많이 배우고 오는 것이 중요하다. TV에서 보던 셰프에 대한 환상만 가지고 오면 돈만 낭비하고 얼마 버티지 못한다. 주방에서 일한다는 것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기 때문이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