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행복의 조건

숫자로 정해놓은 중산층의 조건
"과연 그들은 행복하다 여길까"

박경림 < 방송인 twitter.com/TalkinPark >
얼마 전 유럽에 있는 한 나라의 주한 대사를 만났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최근 28년 가운데 단 2년만 자국에 있었고 나머지 26년은 다른 나라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지금까지 계셨던 나라 중에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요?” “코트디부아르요.” “그럼 그 다음은요?” “베트남이요.” “그 다음은요?” “호주요.” 이쯤 되니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개인적인 순위라지만 1위는 아니더라도 2·3위에는 살짝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안 좋아요?” 기다리다가 먼저 묻고 말았다. 그러자 그 대사는 “아 한국, 물론 좋지요. 자연도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경제 성장도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그런데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갖고 살아요. 여유가 없고, 특히 예의를 보이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너무 많은 것을 강요하는 것 같아요.” 의외의 답변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어서 더 속상했다. “그럼 말씀하신 나라의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없나요?” 대사는 웃으면서 답했다. “전체적으로 행복지수가 높아요. 한국보다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지요. 그래서 좋았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화제를 돌렸다. 한 일간지에서 언급했던 한국의 중산층에 대한 정의가 생각난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10년 이상 한 직장에 다니며 월소득 400만원 이상에 30평대 이상 아파트에 살면서 2000㏄ 이상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 자. 이 정도는 돼야 대한민국에서 중간 또는 그 이상이라는 것인데 과연 이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이렇게 모든 조건과 기준을 숫자로 정해 놓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가 아닐까.

비교하긴 싫지만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이 말했던 중산층의 개념이 떠오른다. 외국어 하나쯤 자유롭게 하고 별미 하나쯤 만들어 손님을 대접할 줄 알고 스포츠를 즐기며 악기 하나쯤 다룰 수 있는, 그리고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설 줄 아는 사람들. 그 어디에도 숫자는 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기준은 달라진다. 그야말로 행복을 만드는 것이 나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한때 나는 ‘행복이란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도대체 행복이 뭐기에 사람들은 이 녀석을 쫓으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그동안 수많은 행복을 놓치고 살아 왔다는 걸 깨달았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비교되고 평가돼 얻은 행복보다 스스로 행복의 주체가 돼 만드는 작은 행복들이 나에겐 훨씬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감사하다.

박경림 < 방송인 twitter.com/TalkinP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