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준법지원인제 시행에 기업들만 '골병'

시행 12일 전 대상 기업 확정…준비 빠른 곳도 5월에나 선임
감사·사내변호사와 역할 겹쳐…일자리 확대 취지도 무색
기업들이 준법지원인제 도입을 놓고 속앓이를 하고 있다. 개정된 상법에 따라 15일부터는 자산 1조원 이상 170여개 상장회사들은 의무적으로 준법지원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하지만 감사나 사내변호사를 비롯한 기업 내 기존의 조직과 역할이 중복되는 등 현실과 동떨어져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준법지원인으로 뽑는 기업도 아직까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당초 제도 도입 취지도 무색해진 실정이다. 재계 관계자는 “실효성도 없고 역할도 모호한 자리를 하나 더 만드느라 기업들이 내부규정을 고치고 인사발령을 새로 내야 하는 등 불필요한 노력과 비용을 들이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제도 시행 12일 앞두고 ‘표준모델’ 확정

상장회사인 K사는 오는 18일 이사회에서 준법지원인 선임안건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LG전자는 27일, 포스코와 KT는 5월 중 각각 준법지원인을 선임할 예정이다. 그렇지만 법규정대로만 보면 이들 기업도 모두 위법상태다. 상법에 따라 15일부터 준법지원인을 두고 준법통제기준도 마련해 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법무팀의 한 관계자는 “준법지원인제도는 강행규정이기 때문에 시행 날짜를 지키지 못하면 이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위법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물론 기업으로서는 현실적인 ‘변명거리’가 있다. 준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업들이 법무부 및 한국상장회사협의회로부터 ‘준법통제기준 표준모델’을 전달받은 것은 지난 3일. 적용 대상 기업 규모도 이날 확정됐다. 개정 상법 시행을 불과 12일 앞둔 시점이었다.

○무리한 제도 도입, 실효성은 의문

법무부의 준법통제기준 표준모델에 따르면 감사나 감사위원은 준법지원인을 겸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직원들의 법준수 여부를 감시감독한다는 점에서 준법지원인의 역할은 감사나 감사위원, 사내변호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할이 비슷한 직책을 중복으로 둬야한다는 점에서 ‘옥상옥’이란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대기업의 법무팀 관계자는 “우리 회사의 경우 이미 사내변호사가 4명 있고, 로펌의 고문변호사도 뒀기 때문에 준법지원인의 역할이 모호하다”고 지적했다.준법지원인 제도의 실효성도 여전히 의문이다. 현행 금융회사의 준법감시인과 달리 권한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 금융회사의 경우 준법감시인으로 상무 전무 부사장급에서, 시중은행은 통상 부장급에서 임명되지만 준법지원인은 법무팀 10년 이상 경력의 대리나 과장급이면 된다.

○변호사 취업 확대라는 당초 취지도 무색

준법지원인 제도는 처음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의 일자리 확충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아직 로스쿨 출신을 준법지원인으로 뽑겠다는 곳은 드물다. 대부분 기존 직원들이 겸직토록 하는 분위기다. 표준모델에도 준법지원인은 영업 관련 업무만 아니면 다른 업무를 겸직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인터넷 포털업체인 A사는 사내변호사가 준법지원인을 겸임하기로 했다.
◆ 준법지원인

임직원들에게 회사의 사업운영 관련 준법교육을 실시하고 위법 여부를 점검해 이사회에 보고하는 일을 한다. 영업 관련 업무 이외 다른 업무는 겸직이 가능하지만 감사는 겸할 수 없다. 자산 1조원 이상 상장사는 4월15일부터 준법지원인을 1명 이상 두어야 한다. 의무조항이지만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과태료 등 벌칙은 없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