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블랙아웃 위기는 다가오는데…

정치권 또 '반값 전기료' 퍼주기
한전 적자 3분의1이 농사용 전기
전기료 정상화…소비부터 줄여야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농림수산식품부가 농업 산지유통시설 전기료를 산업용에서 농사용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전력과의 협의도 마무리돼 4월부터 소급 적용키로 했다는 것이다. 하루 8시간씩 200㎾의 전력을 사용하는 산지유통시설의 전기요금이 연 3400만원에서 1800만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게 됐다.

산지유통시설 전기료를 농사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농민단체가 때만 되면 들고 나온 단골 메뉴다. 하지만 산지유통시설은 농산물의 상품화라는 기업 행위를 하는 곳이라는 한전의 반대 논리에 부딪쳐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빚더미에 눌린 한전이 결코 찬성할 리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던 한전이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 이유는 간단하다. 농민단체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반대하며 이 이슈를 FTA 후속조치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했고 총선을 눈앞에 둔 정치권이 그 요구를 덥썩 물어버린 것이다. 정치권이 표에 정신을 놓은 사이 농민단체가 ‘반값 전기료’를 전리품으로 챙긴 셈이다. 불가피한 조치라지만 농업계가 한·미 FTA를 빌미로 챙긴 전리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면세유 지원이 10년 연장된 데다 1t 트럭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수입사료 무관세, 부가세 영세율 10년 연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원 효과가 수조원에 이르는 대형 조치들로 즐비하다. 농사용 전기료 적용범위 확대와 같은 자잘한 조치는 아예 논란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다. 한전이 추가로 떠안는 부담이 연 250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조치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국가 에너지정책의 난맥상을 더욱 헝클어놓을 수 있는 정책이라는 점에서다.

기회가 될 때마다 적용범위를 넓혀온 것이 농사용 전기료다. 기초적인 영농 행위에만 적용되던 것이 축산 쪽으로 확대되더니 곡물건조기로 확대됐고, 곡물이 아닌 작물의 건조기도 포함됐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 타결을 앞두고서는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는 수입산 바나나에 맞서라고 열대작물에도 농사용 전기료를 적용해준 적이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농사용 전기 사용량이 얼마나 되길래 그렇게 쩨쩨하게 구느냐는 비난이 있을 수도 있다. 하기야 지난 1분기 농사용 전력 사용량은 36억㎾h로 전체 전력사용량의 3%에 불과하니 말이다. 647억㎾h나 되는 산업용이나 280억㎾h의 일반용과는 비교조차 되질 않는다. 그러나 한전의 연간 적자 2조3000억~2조5000억원 가운데 농사용에서 빠져 나가는 돈이 7000억원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한전은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전기료를 올렸다. 하지만 농사용만큼은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농민 얘기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꼬리를 내리는 정치권과 정부 탓이다. 그 결과 산업용 전기는 원가 회수율이 94.4%까지 높아졌지만 농사용은 아직도 32.8%에 불과하다. 농사용 전기를 100원어치 쓸 때마다 한전은 70원씩 적자를 본다는 얘기다. 물론 농사용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용이나 심야전력, 주택용도 비정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전력요금 체계의 왜곡이다. 싼 전기가 넘쳐나는데 아무리 절약을 외쳐본들 먹혀들 리가 없다. 농촌의 비닐하우스 난방이 전기로 바뀌고, 고추건조기용 전기는 취사용으로 전용된다. 한전의 감시를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가정에서는 한겨울에도 반팔이고, 학교는 시스템에어컨 설치작업에 분주하다.

한전의 전력 공급원가가 100원이라면 평균 판매가는 90원 수준이다. 전기요금을 10% 올리면 연간 전기소비가 4% 줄어든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해 한전의 전력판매량이 4551억㎾h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기료를 원가 수준으로만 올려도 한 해 200억㎾h에 가까운 전기가 절약되는 셈이다. 100만㎾짜리 원전 2기를 가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정부는 작년 말 전기요금을 올리면서 농사용 전기만큼은 실태 조사를 통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 발언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정치판의 표 논리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블랙아웃 위기 때는 전력요금 체계를 비난하다가, 표가 급하면 전기료를 내려주지 않는다며 생떼를 쓰는 정치인들이다. 또 다시 여름철 전력 피크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 사람들이 올여름에는 또 어떤 말을 할지. 답답할 뿐이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