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 탁~ 탁~ 탁 소리는 아직 들리는 것 같은데…
입력
수정
스토리&스토리 - 2030 기자의 아날로그 이야기“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1868년 잉크리본 방식 등장…'레밍턴' 타자기의 대명사로
사무실 서류 작성 필수품…PC에 밀려 추억 저 편으로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소설 ‘빵굽는 타자기’의 한 구절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오스터 역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에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받고 대본 각색을 했고 학생 잡지에 서평도 썼다. 심지어는 포르노소설을 쓰기도 했다. 책의 원제는 ‘Hand to mouth(하루 벌어 겨우 먹고 산다)’인데 국내 번역본의 제목 덕분에 책을 읽다 보면 담배를 물고 인상을 찌푸린 채 전동타자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오스터의 얼굴이 연상된다. 실제로 오스터는 타자기 애호가로 유명하다. 그는 ‘타자기를 치켜세움’이란 에세이에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낡아 못 쓰게 돼서 결국에는 그 용도를 잃게 되지만 내 타자기는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몇 달만 더 지나면 그것은 정확히 나와 반평생을 함께한 셈이 될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기계 고장 피하기 위해 ‘쿼티’ 자판 고안
타자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영국인 헨리 밀로 알려져 있다. 밀은 눈이 불편한 사람들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울 목적으로 타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1714년 영국 정부가 그에게 내준 특허장에는 “글자를 인쇄한 것처럼 종이나 양피지에 깨끗하게 쓸 수 있다.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고 수정이 불가능해 공문서 등에 적합하다”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타자기가 상용화되기까지는 150년의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타자기의 원형을 만든 사람은 미국의 인쇄기술자 크리스토퍼 숄스다. 신문사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1868년 잉크 리본을 이용한 타자기로 특허를 받았다. 활자키를 누르면 금속으로 만든 활자가 잉크 리본을 눌러 글자를 쓰는 방식이다.
그는 1873년 ‘4열 자판’을 확립했다. 자판 상단 왼쪽부터 QWERTY 버튼이 순서대로 배치된 ‘쿼티’ 방식이다. 숄스가 이 방식을 채택한 이유가 재미있다. 초기 자판은 대개 2열 자판으로 ABCD가 순서대로 나열된 방식이었다. 이 자판은 T H S 등 자주 쓰는 자판이 가까운 곳에 있다. 근거리에 있는 자판을 빠르게 누를 경우 키가 꼬이는 등 타자기가 고장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숄스는 고장을 막기 위해 자주 쓰는 버튼을 가능한 한 멀찍이 배치한 ‘희한한’ 글자판을 만든 셈이다. 이듬해 총기 회사 레밍턴이 숄스로부터 타자기 특허권을 사들였다. 이때부터 ‘레밍턴 타자기’가 타자기의 대명사로 올라서게 됐다. 레밍턴사는 타자기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의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에게 타자기로 작품을 쓸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트웨인의 1883년 작품 ‘미시시피에서의 생활’은 타자기로 쓴 최초의 문학작품이다.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1914년 만들어졌다. 재미교포 이원익은 영문 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타자기를 만들었다. 1949년에는 안과 의사이자 의학박사인 공병우가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 원리를 이용한 세벌식 타자기를 선보였다. 세벌식 자판은 한글 입력에 가장 효과적인 자판 배열로 알려져 있지만 정부가 현재 방식과 같은 두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삼으면서 세벌식 자판 사용자는 줄어들었다.
◆사라진 타자기
1930년대 전동식 타자기가 등장하면서 기계식 타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워드프로세서가 이 자리를 대체했고 1980년대 들어 개인용컴퓨터(PC) 보급으로 타자기 수요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지금은 일부 애호가들의 전유물이 돼버린 상황이다. 소설가 성석제가 쓴 ‘레밍턴 전동타자기’의 한 구절이다. “특별할 것도 없고 고전적인 것도 아니고 한시대를 풍미한 것도 아니며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었던 어정쩡한 필기구, 레밍턴 전동타자기가 그리워진다. 그래도 그런 게 세상 어딘가에 몇 개쯤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쓰고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