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의 아디다스 vs 승리의 나이키…명승부마다 그들도 뛰었다

[세기의 라이벌] (34) 아디다스 - 나이키

수제 러닝화 시초'아디다스'
1920년 독일 다슬러 형제 창업
유럽시장 휩쓸며 명성 쌓아…'불가능은 없다'로 도전 강조

스타 마케팅'나이키'
운동화 보따리상으로 출발
'니케'의 날개에서 로고 따와…마이클 조던 후원하며 급성장

지난 2월 열린 2012 호주오픈테니스 남자단식 결승전. 5시간53분의 혈전 끝에 노박 조코비치가 라파엘 나달을 물리치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나달의 티셔츠에는 나이키 로고가 박혀 있었고 조코비치는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뛰었다.

스포츠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를 꼽으라면 단연 아디다스와 나이키다. 독일에서 태어난 아디다스는 1980년대까지 유럽시장을 휩쓸며 세계 스포츠 마케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반면 미국의 나이키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스타마케팅을 앞세워 아디다스의 아성을 허무는 데 성공했다. ◆다슬러 형제의 신발공장

모든 것은 ‘다슬러 형제의 신발공장(Gebrder Dassler Schuhfabrik)’에서 시작됐다. 1920년 독일의 아돌프(아디) 다슬러와 루돌프 다슬러 형제는 너무도 쉽게 닳아버리는 운동화에 불만을 갖고 집 세탁실에서 내구성이 좋은 신발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아디다스 수제 러닝화의 시초였다.

형제의 아버지는 구두공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했다. 그들은 자연스레 섬유 가공, 신발 세탁, 재단 등 신발을 만드는 수많은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전설적인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가 그들의 신발을 신고 대회 4관왕을 거두자 전문 스포츠 브랜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제는 사업권을 둘러싼 갈등 끝에 갈라서게 됐다. 루돌프 다슬러는 1948년 회사를 떠나 ‘푸마’를 설립하고 아디 다슬러는 회사명을 자신의 이름을 딴 ‘아디다스’로 바꿨다.
1960~1980년대 아디다스는 적수가 없었다. 특히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아디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는 스포츠 용품 사업 진출을 시도했다. 프랑스에서 수영용품 ‘아레나’를 만들고 ‘르코크 스포르티브’를 인수하는 등 거침없이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호르스트가 힘을 기울인 부분은 월드컵과 올림픽에 아디다스 물품을 독점 계약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방위적인 로비력을 동원해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임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스포츠 정치에 몰두한 사이에 아디다스는 본연의 경쟁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대중의 취향 변화에 둔감해졌고 인건비가 높은 독일과 프랑스 공장의 이익률은 계속 떨어졌다. 나이키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맹위를 떨친 것도 이즈음이었다. 결국 1992년 1억5000만마르크의 적자를 내기에 이르렀고 아디다스는 다슬러 가문의 손을 떠나 제3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위기에 빠진 아디다스를 살린 건 로베르트 루이스 드레푸스 회장이었다. 그는 경영진을 교체하고 공장을 해외로 옮겨 생산성을 높였다. 공용어는 독일어에서 영어로 바꾸고 길거리 농구, 월드컵 등 다양한 곳에 광고를 실었다. 아디다스는 4년 만에 재기에 성공했다. ◆35달러짜리 나이키 로고

육상선수 출신의 필 나이트와 그의 코치였던 빌 보어맨은 1964년 일본 오니츠카 타이거사의 러닝화를 수입해 팔았다. 말이 무역이지 트럭에 신발을 잔뜩 싣고 운동장에 부려놓는 ‘보따리상’에 가까웠다. 회사 이름은 ‘블루 리본 스포츠(BRS)’.

1972년 두 사람은 직접 신발을 만들어 팔기로 결심하고 회사명은 나이키, 로고는 ‘스우시(Swoosh·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로 정했다. 나이키신화의 시작을 알린 운동화 ‘와플 트레이너’는 보어맨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어느날 아내가 와플 굽는 것을 보고 운동화 밑창에 와플처럼 격자무늬를 넣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게 해서 처음 나온 신발은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 밑창을 만들고 이를 신발바닥에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명과 로고를 둘러싼 일화도 재미있다. BRS의 초기 멤버였던 제프 존슨은 어느날 “니케(Nike)”를 외치며 잠에서 깼다. 그리스 음유시인들이 꿈에 강림한 무사이 여신의 입을 빌려 노래했듯이 존슨 역시 꿈에서 승리의 여신을 만나 영감을 얻은 것이다. 니케의 날개와 옷자락의 흐르는 선을 따온 로고 스우시는 평범한 미대생 캐롤린 데이비슨의 작품이다. 데이비슨이 이 로고를 나이키에 넘긴 대가로 받은 돈은 고작 35달러. 2011년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는 139억달러까지 치솟았다.

나이키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이는 바로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은 대학 시절 아디다스를 즐겨 신었다. 미국 프로농구(NBA)에 진출한 그는 아디다스와 계약하길 원했지만 당시 아디다스는 미국 농구시장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 나이키는 조던을 위해 ‘이노베이션 키친’을 꾸리고 30여명의 디자이너를 투입, ‘에어조던’이라는 걸작을 내놨다. 당시 NBA 사무국은 색이 들어간 농구화를 신을 수 없도록 했지만 나이키는 매경기 1000달러의 벌금을 대신 내주면서 검은색과 빨간색이 들어간 에어조던을 신겼다. 결과는 대 성공. 나이키는 지금까지 에어조던 시리즈로만 매년 10억달러(1조14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경기 후원 아디다스 vs 선수 후원 나이키

두 회사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전후로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32개 출전 팀 가운데 아르헨티나 프랑스 독일 등 12개 팀은 아디다스, 브라질 등은 나이키와 계약을 맺었다. TV 광고 대결도 뜨거웠다. 아디다스가 다비드 비야와 리오넬 메시를 모델로 내세우자 나이키는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호나우지뉴로 맞섰다.

공식 스폰서 성적으로만 보면 아디다스가 앞선다. 경기 자체를 후원하는 ‘거시적 접근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1996년 아디다스는 2014년까지 3억5000만달러(3990억원)에 달하는 월드컵 후원계약을 맺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이어 2012년 런던올림픽의 공식 스폰서도 아디다스다. 하버트 하이너 아디다스 최고경영자(CEO)는 “런던올림픽으로 연간 1억파운드(1800억원) 정도 매출이 증가할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2015년까지 나이키를 꺾고 1위를 탈환하겠다”고 공언했다.

반면 나이키는 스타 선수를 후원하는 ‘미시적 접근’을 꾀한다.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 존 매켄로 등이 나이키가 후원한 선수들이다. 모두 각 분야 최고들이다. 매켄로가 경기에 신고 나간 테니스화는 한 주에 2만켤레가 팔린 적도 있다. 선수 자체가 광고판이다. 매출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최고의 선수가 쓰는 제품으로 자연스레 승리, 열정, 도전의 이미지를 쌓아갔다.

◆“Just DO IT” vs “Impossible is nothing”

스우시와 함께 나이키 정신을 상징하는 슬로건 ‘Just Do It’은 1988년 탄생했다. 당시 나이키는 에어로빅 시장을 개척한 리복에 밀려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때 나이키 앞에 위든앤드케네디라는 광고대행사가 나타났다. 위든앤드케네디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제품이 아니라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여준 뒤에 ‘우선 해보라’는 도전정신을 담자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검은 화면에 새하얀 3개의 단어만 나열된 광고가 미국 전역에 방영됐다.

아디다스는 오랫동안 ‘Forever Sports’를 카피로 사용해왔다. 그러나 나이키의 ‘Just Do It’에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이에 2004년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때 하키와 스케이트보드 선수였으나 사고로 두 다리가 마비된 스테이시 코헷이 휠체어를 굴리며 “난 여전히 네 개의 바퀴를 쓴다/잘 보라고 난 지금도 할 수 있어/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광고에 대중은 감동했다. 2007년에는 메시, 데이비드 베컴, 길버트 아레나스가 힘든 시절을 이겨낸 이야기를 담은 캠페인을 내보냈다. 일단 해보라는 도전정신과 불가능은 없다는 두 회사의 슬로건은 스포츠계의 수많은 전설과 어우러져 지구촌 소비자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는 평이다. 그것이 기업 이미지를 더 고양시키고 두 회사는 다시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이벤트와 스토리를 선사하는 선순환을 이어가고 있다. 흔해빠진 운동화를 도전과 열정으로 상징화한 데 성공한 보상이기도 하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