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갈수록 아무 法이나 찍어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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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입법에 청부입법까지최악이었다. 폭력이 난무하고 해머가 등장하고 최루탄이 터지고 공중부양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종북과 극좌 투쟁가들을 차기 국회에 대거 진출시킨 때문만도 아니다. 18대 국회는 무려 1만3912건에 이르는 엄청난 법안을 쏟아냈다. 이 중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이 12%인 1693건, 의원이 제출한 것이 나머지 1만2119건이다. 정부도 정부지만 300명 국회의원들이 평균 40건의 법률안을 제출했다. 법안을 제출하는 데 필요한 도장 수는 건당 10개다. 그러나 보통은 스무 개 이상의 도장을 받는다. 어림잡아 20만개 이상의 도장이 춤을 췄다.
가결률 10%대, 입법권의 타락…결국 法에 대한 존경심 훼손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이들 법안 중 17%, 2353건만 가결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정부 제출 법안의 가결률은 40.8%, 의원입법은 13.6%였다. 의원 법안 중 폐기된 것은 4127건, 철회된 것이 503건이었다. 모골이 송연하다. ‘아니면 말고’식으로 법안을 만들어낸 결과다. 날치기라도 벌어지면 무슨 법이 끼워팔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100건 이상의 법안을 발의한 의원도 10여명에 달한다. 자유선진당의 L모 의원은 무려 349건의 법안에 이름을 올렸고 민주통합당의 K모 의원도 196건의 법안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을 빌려주는 품앗이 발의다. 자기가 서명한 법안을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정법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특정 집단에 특혜와 특권를 부여하거나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며, 국민의 오랜 관습을 강제로 뜯어 고치려는 권력자들의 무언가의 시도에 불과하다. 한때 법안을 많이 발의하면 좋은 국회의원이라고 칭찬하던 시절도 있었다. 시민 단체들은 의정활동을 평가하면서 법안을 많이 발의한 사람을 우수 의원으로 꼽았다. 입법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었다. 경실련 같은 교수단체들까지 그런 무식한 평가를 해왔다. 경실련은 최근 들어서야 질적 지표를 의원 평가에 반영한다.
국회의 법안 발의는 지난 김영삼 정부 때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5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모두 1951건이었다. 14대보다 116% 늘어났다. 16대에 들어서는 여기서 다시 28% 늘어난 2507건을 기록했고, 노무현 정부 집권기인 17대에서는 전기보다 무려 3배나 늘어난 7489건, 18대 들어서는 여기서 또 두 배 늘어난 1만4000건을 기록했다. 유례없는 법안 홍수 사태가 터진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가결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김영삼 시기인 15대의 57%에서, 김대중 시기에 38%로, 노무현 집권기에 26%로 낮아졌다. 이제 17%까지 뚝뚝 떨어졌다. 다음 국회에서는 10% 이하가 될 것이다.
법도 아닌 법이 법의 이름 아래 무더기로 쏟아졌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고 대중의 입맛대로 특권과 규제를 창설하는 법의 타락이요 부패였다. 요즘은 로펌들이 법안을 만들어 주는 소위 청부입법 도급입법도 유행이다. 지역과 이권 단체들이 특정 법안을 강요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국회에서의 다수결이란 기껏해야 표결 시점에 의원들이 갖는 취향과 기분, 지극히 단순한 정보들을 반영할 뿐이다. 그 어떤 표결도 그것이 유도하려는 결론에 따라 다양하게 자의적으로 설계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민주주의는 너무도 허약하다.타인의 재산을 내 마음대로 처분하는 사실상의 강도행위가 입법의 이름 아래 자행된다. 무언가의 사회적 목표를 위해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국가폭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5년 내내 이렇게 법도 아닌 법이 쏟아졌다. 대중이 원하면 그만이라는 발상은 실로 얼마나 폭력적인가. 누가 뭐래도 입법의 타락은 법에 대한 존경심을 약화시킨다. 법률에 불복해 위헌을 다투는 소송이 최근 들어 크게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법부는 더 치명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도 아닌 법으로 재판해야 한다. 입법 기능에 고장이 난 것이 분명하다. 의원별로 법안 제출 건수에 상한선이라도 두어야 하나.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