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전직금지가 능사인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
2000년의 일이다. 고급 인력이 벤처기업으로 마구 빠져 나가자 삼성전자 등 대기업이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대기업은 “우리가 벤처 인력공급소냐”며 불만을 토했다. 대기업은 법적 소송과 별도로 관료주의 타파, 파격적 연봉 인상 등 자구책을 동원해야만 했다. 지금의 대기업 인사 및 보상시스템은 당시 ‘벤처 엑소더스’와 무관하지 않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 반대다. 벤처나 중소기업이 키워놓은 핵심인력을 대기업이 빼간다고 불만이다. 대기업에서 벤처로 인력이 빠져 나갈 때는 팔짱끼고 보던 정부도 가세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중기 핵심인력의 스카우트를 막을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하고, 공정거래위원장 등은 스포츠 시장에서의 이적료를 적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대기업 간 인력분쟁도 급증하는 양상이다. 현대오트론-삼성전자-LG전자-현대차,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 삼성전자-LG전자, 삼성전자-KT 등이 그렇다. 여차하면 전직금지 소송도 불사할 그야말로 살벌한 분위기다.

회사 · 종업원 이익균형 찾아야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기업 간 싸움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영업비밀을 갖고 있는 기업의 권리도 있지만 이직을 원하는 당사자의 권리도 있다. 기업과 종업원의 이익도 충돌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15조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상법상 경업금지의무나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 보호에 따른 전직금지 조치라 해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지 않는 범위에서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 소송 때마다 전직금지의 필요성과 기간을 놓고 매번 논란이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정부가 가이드라인이나 이적료를 도입하면 이는 사실상 인력이동을 금지하는 규제나 다름없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둘째 치고 정작 중소기업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조치다. 핵심인력이 처음부터 중소기업에는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간 전직금지 소송도 마찬가지다. 고래 싸움에 핵심인력들만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산업기술유출방지법까지 들이대기 시작하면 핵심인력이 졸지에 범죄자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무리 과학기술을 외쳐도 이공계 기피가 아예 고착화되어버릴 위험도 있다. 그때는 뺏고 빼앗길 인력조차 없게 되고 만다.

미국은 '경쟁', 독일은 '보상'

물론 영업비밀은 보호돼야 한다. 불법적 기술유출은 엄연한 범죄다. 하지만 그 가능성만 내세워 전직을 금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력이동도 경쟁의 과정이고, 모빌리티가 경쟁 압력을 높여 혁신을 자극한다는 연구결과도 많다. 미국 법무부가 애플 구글 인텔 어도비 등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인력을 상호 스카우트하지 않겠다고 공모한 점을 문제 삼고 나선 것도 그런 관점이다. 임금담합을 통해, 또 핵심인력의 지식과 노하우를 이용할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각각 경쟁을 제한했느냐가 초점이다. 독일의 경우 전직금지기간 중 최소한의 대가로 직전 연봉의 50%를 당사자에게 지급하도록 한다. 취업기회 박탈에 따른 보상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소프트웨어가 중요해지면서 인력 빼가기 논란도 많지만 결국 그런 압력이 몸값을 크게 올린 동인이 됐다. 시장의 이런 신호를 보고 좋은 인력이 몰리기 시작하면 그게 곧 산업발전이다. 정부 인력정책도 달라져야 하지만 중소기업도 역발상과 자구책이 필요하다. 중간에 삼성 등 대기업으로 이직할 사람도 뽑겠다는 내용의 공고를 내 채용한 뒤 꿈과 비전, 보상시스템을 통해 이들 우수 인력을 머물게 만든 중소기업도 있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