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투자'로 年매출 2000억 일군 정미소집 막내딸

기업&기업人 - 파워기업인 생생토크 < 박혜린 옴니시스템 회장 >

23세 때 타이어 수입회사 첫 사업…외환위기 때 쓰러진 회사들 인수
종자돈 5억으로 시작…10여곳 M&A

30년 넘은 1등 기업만 인수…남자들 텃세에 눈물 흘리기도
박혜린 회장(44·사진)과의 인터뷰 첫 질문은 “이름 뒤에 직함을 뭐라고 써야 할까요”였다. 직함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다. 무슨 협회나 위원회 조직의 직함이 아니다. 모두 그가 경영하거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의 대표이사직이다. 그는 “어떤 게 좋을지 판단이 잘 안 서는데 일단 옴니시스템 대표이사 회장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옴니시스템은 그가 4년 전 인수한 국내 1위의 전자계량기 제조회사로, 최근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회사라고 한다. ○10여곳 경영하는 파워 중기인

박 회장은 상장사인 옴니시스템과 신용카드 제조회사인 바이오스마트를 비롯해 10개 이상의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비상장사들은 그가 100% 지분을 갖고 있거나, 그 회사가 다시 100% 투자한 자회사들이다. 여기엔 의료장비를 만드는 ‘디지탈지노믹스’, 화장품 제조회사 ‘한생화장품’, 고급 보석 유통회사 ‘코를로프’, 타이어 수입·판매회사 ‘가인상사’가 있다. 박 회장 소유의 건물을 관리하는 부동산 관리회사가 몇 개 더 있다.

이들 회사의 연간 매출을 합하면 2000억원이 넘고, 종업원 수만 800여명에 달한다. 웬만한 중견그룹 수준이다.‘박혜린 그룹’은 모두 그가 인수·합병(M&A)을 통해서 이뤄낸 것이다. 그에게 ‘M&A 귀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박 회장이 경영하는 계열사의 총 자산이 1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본인에게 물었더니 “정확히 따져보지 않았지만 소문이 과장된 것 같다. 많아 봐야 몇 천억원 수준”이라고 웃었다.

○주식투자 실패에서 경영기본 배워

박 회장은 미혼이다. 국내에서 그 나이의 미혼 여성 기업인이 이처럼 많은 회사를 거느리며 큰 돈을 번 예는 드물다. “돈이 어디서 났겠어. 부모를 잘 만났겠지.” 세간엔 이런 수근거림이 없지 않다. “부모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돈 버는 법. 돈을 키우는 법. 이런 거는 부모님이 물려 주신 유전자예요. 첫 사업의 종잣돈 5억원도 부모님이 대주셨고요.”

그는 그러나 “그게 다”라고 했다. 그 다음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1969년 경기도 여주 점동면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성공할 ‘싹’이 보이는 아이였다. 인사를 잘해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독차지하고 용돈을 받으면 곧바로 동네 마을금고로 달려가는 ‘저축왕’이었다. 정미소와 미곡상을 하던 아버지 박재성 씨는 이런 막내딸을 애지중지해 전국을 돌며 쌀을 사고파는 현장을 보여줬다. 박 회장은 “친구들이 구슬치기 하고 고무줄 놀이할 때 저는 쌀 한 가마니를 팔면 얼마나 남는다는 것을 배웠죠”라고 회상했다.

그가 처음 저금통을 깬 것은 서울여대 3학년 때. 주식투자 때문이었다. 그는 2년간 주식투자를 했지만, 졸업할 즈음 ‘다시는 주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주식을 사는 타이밍은 제가 결정할 수 있지만 파는 때는 제가 결정할 수 없어요. 성공하려면 제가 리드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죠.”

○타이어 수입·판매로 사업 시작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창업했다. 종잣돈 5억원은 어머니가 줬다. 1992년 수입 타이어인 ‘굿이어’의 서울지역 총판권을 인수, 서울 대치동 포스코 사거리에 ‘가인상사’라는 법인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직원 10명과 함께 5년간 고생하며 경영의 기초를 쌓았다. 처음엔 결제대금을 떼먹고 도망가는 카센터 사장들을 원망하며 혼자 운 적도 많았다고 한다.

○기회가 된 외환위기

도약할 기회는 외환위기 때 찾아왔다. 동종업계가 자금난에 허덕일 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쓰러져가는 타이어 유통회사들을 인수했다. 외환위기 후 가인은 수입 타이어 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항상 내가 아는 업종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처음으로 제조업에 도전하게 된 것이 바이오스마트였죠.”

그는 2004년 국내 최대 신용카드 제조회사인 바이오스마트를 인수했다. 카드대란으로 2년 동안 대표이사가 3명이나 바뀐 위기의 회사였다. 박 회장이 처음 찾아간 곳은 경기 아산 공장이었다. 직원들은 새 주인의 손을 잡고 회사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그때 처음 제조업이 그동안 해왔던 유통업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기업 경영의 성패는 결국 사람에서 나온다는 것을.

○“고난을 이겨내는 게 CEO의 책무”

그는 직원들에게 “반드시 인력 구조조정 없이 회사를 정상화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본인은 연구개발팀장을 맡아 제품 개발에 참여하며 365일 현장을 돌았다. 노사가 일심단결한 결과 회사는 흑자로 돌아섰고, 박 회장은 이를 기반으로 다른 동종 업체 둘을 더 인수해 카드 제조시장에서 70% 이상을 점유하게 됐다.

2008년 금융위기 때 힘든 고비가 또 한 차례 찾아왔지만, 박 회장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빌딩 등을 정리하고 상장사인 옴니시스템을 인수했다. 옴니시스템은 민수 전자계량기 시장의 85% 이상을 점유하고 있던 회사로, 에너지 절전을 위한 ‘스마트 그리드’ 시장에서 1위 업체였다. 당장 어렵지만 저력을 본 것이다.

그는 “기업을 인수하면서 배운 것은 1등을 해본 경험이 있는 3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기업을 인수해야 웬만한 위기를 버티고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M&A 대상 업체를 이런 기준으로 고른다.

옴니시스템 인수의 성과는 아직 미지수다. 건설시장 불황에다 대기업까지 계량기 시장에 진입하면서 옴니시스템의 작년 매출은 인수 후 처음으로 뒷걸음질쳤다. 영업 적자도 늘었다.

남 모르게 겪은 마음고생도 심하다. “지금은 무덤덤해졌지만 사업 초기만 해도 관료와 남자 경영자들이 툭툭 던지는 모욕적인 언사 때문에 사업을 그만둬야지 하고 심각하게 생각한 적도 많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낙천적이고 적극적이다. “스물셋에 첫 사업을 시작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이겨냈다”며 “옴니의 어려움도 잘 극복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