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 고산, 창업 도우미 나서 "기대·불안 교차하죠"

청계천과 좁은 골목길을 지나 세운전자상가에 들어서니 온갖 부품과 공구, 전자제품 가게가 밀집해 있다. 계단에서 낮술을 즐기는 몇몇도 눈에 띄었다. 언뜻 보아도 평균 나이 40대 이상이 주름잡는 이 세운상가에서 왁자지껄 영어 소리가 들린다. 554호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에선 회의를, 다른 한쪽에선 컴퓨터 작업을, 다른 한쪽에선 개인 업무를 보고 있었다. 우주인으로 유명한 고산 씨가 대표로 있는 ‘타이드 인스티튜트(TIDE INSTITUTE)’다.

“기술(Technology), 상상력(Imagination), 디자인(Design),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의 영어 앞 글자를 조합해 타이드라고 부릅니다. 사단법인으로 설립해 20여 명의 상근·비상근 직원이 있는데 사무실은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논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쓰고 있어요.”우주인 교체 이후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연구 생활을 하던 고산 씨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진학했고 연수 차 들른 싱귤래리티(Singularity) 대학에서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미국에서 말하는 최첨단 과학기술이 뭔지 알아보기 위해 10주짜리 교육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진짜 좋은 거예요. 전문가들에게 교육을 받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실제 실리콘밸리에 가서 창업 과정을 지켜보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면 창업 지원도 받는 거죠. 한국에 가서 내가 한 번 해보자, 결심했어요.”

그렇게 지난해 2월 타이드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그동안 서울·안산과 미국 실리콘밸리·보스턴에서 싱귤래리티 10주 프로그램을 1박 2일로 압축한 ‘스타트업 스프링 보더’를 열었다. 올해에는 연세대 경영대에 관련 강의를 개설했다. 고산 대표가 직접 강의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는 각 분야 전문가와 벤처캐피털 등을 모으고 관련 프로그램과 네트워크를 전국 및 해외로 확산시키는 일종의 창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스타트업 스프링 보더는 전국으로 뻗어나갈 생각입니다. 그 외에도 격주마다 사무실에서 세미나를 열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생각을 나누고 세계의 메가트렌드, 마켓 트렌드를 찾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비영리 단체로 정부와 협력해 일하기도 하고 지정 기부금 단체로 지정돼 기업들의 지원도 받고 있죠.”



▶창업 인큐베이팅 센터가 여럿 있는데, 타이드 인스티튜트의 차별점은 무엇입니까.접근 방법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 인큐베이팅 시설은 장소나 자금 등 하드웨어적인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우리는 소프트웨어적인 지원에 가까워요. 정부 지원책도 좋고 투자자들도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원하려고 하면 똘똘한 아이템이 없다고 말해요. 세계시장에 도전할만한 선도형 아이템이 필요한데, 요즘 젊은 세대는 대부분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 이하 앱)이나 웹, 특히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관련 창업을 주로 해요. 물론 그것도 좋지만 아이디어가 유사하죠.

그래서 기후변화, 물 부족 문제, 도시문제 등 미래의 중요한 이슈, 트렌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세운상가에 자리 잡은 것은 앱이나 웹 이외에 제조업, 제품 개발 등 기술력으로 창업하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예요. 여기엔 온갖 부품이 다 있고, 장인도 많아 신제품 개발이 용이합니다. 세운상가 하면 낡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겠지만 저는 젊은 창업가들이 모이는 새로운 벤처 타운이 될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원래 창업 운동에 관심이 많았나요. 러시아에서 1년간 우주인으로 살면서 나중에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교육 분야에서 일할 생각이었어요. 성격상 교육 쪽이 적성에 맞는 건 아니지만 이미 국민들에게 많은 걸 받았고 공인이 됐기 때문에 사회에 돌려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주인이 교체돼 다행히(다행은 아니지만) 과학기술 정책을 생각하게 됐어요. 우주인 배출이 국가적 프로젝트인데 위기감을 많이 느꼈거든요. 그래서 항공우주연구원에서 2년 반 동안 일했는데, 정책 쪽 공부를 더할 필요를 느끼고 하버드대에 진학한 겁니다. 학비가 비싸 가지 못할 뻔했는데 다행히 장학금을 주겠다고 해서 갔어요. 운 좋게 실리콘밸리에 있는 싱귤래리티 대학에 들르게 됐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죠.

▶창업 운동이긴 하지만 난생처음 창업한 것인데,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시행착오라고 할 수도 없는 게,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실현 불가능한 벽처럼 보이기도 했죠. 그런데 시작하니 길이 보였습니다. 혹자는 저를 엄친아라고 하는데 절대 그건 아니에요.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본 것 같습니다. 힘든 중에서도 어머니가 열심히 사시며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가는 걸 보며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꼭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배웠죠. 조건도 만들어 갈 수 있더라고요.



▶학창 시절엔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나요.

대학을 처음에 서울대 공대로 갔다가 인지공학 분야 연구원이 되고 싶어서 다시 시험을 치르고 자연과학대에 진학했습니다. 자연과학 중에서도 먼저 수학을 전공했고, 그 후 대학원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했습니다. 실제로 삼성기술연구원에서 일도 했는데 일하다 보니 박사 학위가 필요해 유학 준비를 했고 대학원에도 합격했죠. 그러던 중 우주인이 된 겁니다. 우주인을 꿈꿨던 것은 아니지만 최종 선발되니 그 자체로 매력적이어서 몰입하게 됐고 대학원은 포기했어요. 그때 한 번 인생의 방향이 바뀌게 됐네요. 지금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요.

▶평소 기업가 정신을 많이 강조하는 데요, 청년에게 필요한 기업가 정신은 무엇입니까.

기업가 정신은 배운다기보다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의 강연을 들으면 대단해 보이죠. 하지만 내가 직접 창업해 보려고 하면 앞이 깜깜해지거든요. 깜깜한 방 안에 있는 사람에게 ‘가 보라’고 용기를 불러일으켜도 당사자에겐 답답한 얘기예요. 단, 1m 앞이라고 하더라도 한 걸음만 걸어 봐도 알 수 있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해보자는 겁니다. 5년 후, 10년 후 미래를 예측해 보고 시장의 흐름을 살펴보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부딪쳐 보면서 자연스럽게 기업가 정신이 생기는 것이지 기업가 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청년이라는 말 자체가 엄청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삶이 변주될지,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데 요즘 청년들은 너무 스펙에 매여 있는 것 같아요. 꼭 창업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엄청난 가능성을 인식하고 한 번 도전해 보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도 도전을 즐기는 편입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대학에서는 과를 바꿨고 유학을 앞둔 상태에서 우주인이 됐고 지금은 창업했습니다. 만약 우주인이 됐다면 어땠을까요. 사회적 지위도 있고 안정된 삶을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주인 훈련을 받으면서 한 편으로는 박제가 되어가는 느낌도 있었어요. 지금은 그때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느낌이에요. 어느 날 아침, 지금 사업이 없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굳이 안정된 길을 걸으려 하지 않고 도전에 따르는 기대와 불안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내 존재를 100% 발현하며 사는 거죠. 저는 이제 다시 회사로 돌아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안정될 순 있겠지만 그건 제 삶이 아니에요.

▶대학원 공부는 계속할 생각인가요.지금 하버드대는 휴학 상태예요. 1년 공부했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5년 안에 복귀하면 되는데, 그전에 타이드인스티튜트를 잘 돌아가게 만들고 다시 공부해 또 다른 식으로 기여하고 싶어요. 러시아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이 강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창업 이외에 과학기술 정책과 관련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먼 미래에는 한국에서 만든 우주선을 타고 있을 수도 있겠죠. 꼭 무엇을 하고 싶다기보다 ‘내일 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