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수' 남달랐던 그 남자, 10년 만에 사표 쓰더니…부도난 친정회사 인수, '샐러리맨의 전설' 되다

파워기업인 생생토크 - 이재광 광명전기 회장

4개사 인수 중견그룹 체제로…8년 후 '매출 1조클럽' 가입 목표
신입사원 이재광은 ‘싹수’가 달랐다. 입사 동기들이 기술을 습득하는 데 매진할 때 그는 기술뿐 아니라 자재관리와 품질, 인사 등 다른 경영 분야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가 1982년 입사한 경기도 반월공단의 광명전기는 수배전반(전력회사에서 전기를 받아 곳곳으로 이를 배분하는 장치)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중소기업. 당시만 해도 3~4개 대기업을 빼고는 중소기업 가운데 기술력이 가장 뛰어나고 매출도 1위였다.

광명전기에서 10년. 그는 어느날 사표를 던졌다. 직장에서 배울 것은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했다. 좋은 직장이라고 안주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만의 일을 하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1993년, 그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30대 초반에 오너경영인 꿈 이루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가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던 즈음, 한 거래처 사장이 회사 인수를 제안했다. 수배전반에 들어가는 ‘전기 절연물’을 만드는 회사였다. 이름은 ‘한빛일렉컴’. 직원 7명에 매출은 연 5억원 정도인 시쳇말로 ‘콩만한’ 회사였다. 그 회사 사장은 “당신이 경영마인드도 있고, 전기제품에 대해서도 잘 아니 회사를 잘 이끌어갈 것이다. 당신만한 사람이 없다”고 그를 설득했다.

‘구멍가게라도 내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때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막상 회사를 직접 경영하려 하니 ‘그럴 능력이 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1주일 고민 끝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인수 대금은 1억원. 퇴직금과 부모님의 쌈짓돈 등이 종잣돈이 됐다. 샐러리맨 10년 동안 꿈꾸던 첫 사업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회사는 인수 당시보다 매출은 10배, 직원은 3배로 늘었다. 타고난 성실함과 제품에 대한 철저한 품질관리로 그는 업계에서 인정받는 기업인이 돼 있었다. 그래도 그는 배가 고팠다.

그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친정인 광명전기의 옛 동료들이 “회사가 어려우니 인수해 달라”고 찾아온 것. 이유는 이랬다. 당시 광명전기는 창업자가 회사를 판 뒤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경영진의 횡령과 배임으로 경쟁력도 떨어졌다. 직원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노조와 회사는 연일 시끄러웠다.

결국 광명전기는 부도를 맞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회사는 생사의 기로에 섰다. 이 회장도 기로에 서게 됐다. 인수하느냐, 마느냐를 결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친정회사에 대한 애정은 컸지만 인수 걸림돌도 많았다. 우선 규모가 컸다. 50억원 가까운 인수 대금을 마련하는 게 버거웠다. 두 번째는 직원들의 신뢰와 믿음의 문제였다. 노조는 어느새 회사 발전이나 기술 개발보다 자신들의 이해를 더 생각하는 쪽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3개월간의 장고 끝에 결심을 굳혔다. 10년 만에 다시 도전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기본기 충실한 회사로 키우기

이 회장은 이번에도 목숨을 걸었다. 우선 그동안 알토란같이 키워온 한빛일렉컴부터 정리했다. 여기에 지인들로부터 투자받고, 집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아 광명전기 지분 9%를 인수했다. 인수대금은 45억원.

2003년 7월 광명전기 대표이사로 취임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이 들어왔다. 광명전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현금흐름이 좋은 회사였다. 전기 분야에서 50년 가까운 업력을 갖고 있고 영업력과 기술이 있었다. 연 매출은 300억원 정도. 회사 내 현금도 많았다. 반면 지배구조는 약했다. 적대적 M&A의 좋은 타깃이었다.이 회장은 1년여간의 치열한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 우호지분을 포함해 30%의 지분을 확보했다. 주위에선 “평사원이 20년 만에 사장이 됐다”며 ‘샐러리맨의 우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이 회장은 그런 달콤한 칭찬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했다. 직원들을 열심히 뛰게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그 스스로 현장을 지키면서 모든 직원이 혼연일체로 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밤을 지새우는 날도 많았다.

다음은 기술 개발. 당시 광명전기가 만들던 제품은 딱 두 가지. 전기를 받아 배분하는 수배전반과 변전실용 개폐장치(gas insulated switchgear). 그는 새 제품으로 시장을 넓혀 나가면 회사 내부의 혼란을 정비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그는 10명이던 연구소 직원을 30명으로 늘렸다. 품목도 차단기와 개폐기, 원자력 전기설비까지 50여종으로 확대했다.

해외시장도 적극 공략했다. 아랍에미리트(UAE)를 포함해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인도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10개국으로 판로를 넓혔다. 올해 100억원의 수출이 예상된다.

이 회장은 회사를 정상화시키면서 M&A에도 적극 나섰다. 동종업계는 물론 자동차부품, 유통 분야에 있는 4개 기업을 인수해 조직을 10년 만에 중견그룹 체제로 키웠다.

광명전기만 해도 인수 당시 300억원이던 매출이 600억원이 됐다. 그룹 전체로는 1200억원 규모다. 그의 취임 후 외형이 4배 이상 커진 셈이다.

이 회장은 “광명전기의 성장은 이제 시작”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8년 후인 2020년, 매출 1조원 클럽 가입을 꿈꾸고 있다.

맨주먹으로 중견그룹을 일군 이 회장은 “직원들을 믿고 뚜벅뚜벅 걸어간다면 1조원 클럽 비전 달성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 이재광 회장은…
술 · 담배 안 하고 정석골프, 누가 봐도 '바른생활맨'…"이젠 사회공헌 하고 싶다"

이재광 광명전기 회장(53)은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주위의 평가는 다르다. 오랫동안 그를 알아온 한 기업인은 “이 회장의 반듯함이 어려움을 기회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반듯함. 그런 걸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 한 지인은 “골프를 치면 이 회장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골프는 소위 ‘정석’ 플레이다. 멀리건(동반자의 양해를 받고 다시 치는 샷)도 없고,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그린 위에서 기브(오케이)를 받지 않는다. 그는 73타 기록도 갖고 있다.

공부도 열심이다. 대전공전을 졸업한 그지만 광명전기에 입사한 뒤 주경야독으로 건국대(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전기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다. 2009년엔 숭실대 중소기업대학원에서 석사학위(경영학과)도 땄다. “배우면 배울수록 더 목마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주위에선 그를 ‘바른생활맨’으로 부른다. 이 회장 자신도 이런 별명이 싫지 않다. 그는 “회사 경영에서도 정도를 따르려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회사에 비밀을 만들지 않는다. 웬만한 숫자와 경영방침 등은 모두 공유한다. 직원들에게도 회사가 모두의 것임을 항상 강조한다. 복지도 여느 대기업에 뒤지지 않게 하려 노력한다. 이런 과정으로 광명전기는 지난해 안산시 노사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약점이 있다. 술을 못한다. 기업경영자로 술자리가 적지 않은데,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술을 못하는데 억지로 하다가는 실수하거나 뒤탈이 있게 마련”이라는 설명이다.바른생활로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 그는 최근 ‘치국(治國)’에도 나섰다. 2009년 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 이사장에 선출된 후 동반성장위원회 중소기업대표 위원,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이 회장은 “기회가 되면 더 넓은 세상에서 상식과 정도가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안산=박수진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