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마트 '백지계약서' 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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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유통계약 실태조사
수수료율·대금조건도 정하지 않고 납품 계약 강요
공정거래위원회가 납품업체에 판매수수료율, 대금지급 조건 등 핵심 내용을 빈칸으로 남긴 채 계약을 강요하는 대형 유통업체들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납품업체와 계약을 맺을 당시에는 이런 핵심 거래조건을 비워놓고 사후에 편의에 따라 계약조건을 채웠다는 것이다.
◆“유통업체 빈칸계약서는 위법”공정위는 일부 중소 납품업체와의 계약 때 핵심 내용이 빠진 ‘백지계약서’를 사용한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에 법 규정 준수를 요청키로 했다고 17일 밝혔다.
공정위에 따르면 6개 대형 유통업체는 상당수 중소 납품업체와 계약할 때 상품대금 지급조건과 판매수수료율, 판촉사원수, 매장위치와 면적, 계약기간 등 핵심 내용을 미리 정하지 않고 계약한 뒤 대형 유통업체 마음대로 빈칸을 채웠다.
계약서와 함께 작성하는 부속합의서에도 판촉비용 분담비율, 반품기준, 반품대상 등 중요한 내용을 미리 정하지 않고 공란으로 남겨놓았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백지 계약서를 넉넉하게 받아놓은 뒤 수시로 변경되는 계약조건을 채워넣기도 했고, 아예 계약기간이 끝난 뒤 형식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경우도 있었다.공정위 관계자는 “대형 유통업체들이 납품업체에 과도한 판촉비용을 부담시키거나 지나치게 많은 판촉사원을 요구하는 등의 불공정행위를 한 뒤 계약서를 입맛에 맞게 작성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은 해외 유명브랜드와 계약할 때는 핵심 계약내용을 구체적으로 명기한 계약서를 사용하는 이중행태를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는 조만간 6개 대형 유통업체와 간담회를 열어 서면계약 준수를 요청키로 했다. 이번에 적발된 위법행위는 구체적인 혐의사실을 정리해 시정조치를 내리는 등 엄중 조치하기로 했다.지철호 공정위 기업협력국장은 “납품업체들과 연쇄 간담회를 열고 핫라인을 운영해 백지계약서 관행을 개선하겠다”며 “대형 유통업체의 관행 중에 추가로 고칠 것이 있는지 계속 사례를 수집하겠다”고 말했다.
◆업계 “시정하겠다”
유통업체들은 ‘불완전 계약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도 앞으로 보다 투명한 거래 정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매주 수백~수천개씩 품목을 바꿔가며 할인행사를 하는 대형마트들은 행사할 때마다 합의서를 작성하는 게 힘들다고 지적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공정위가 발표한 불완전 계약서 사례는 연간 거래 계약서가 아니라 매주 바뀌는 판촉행사와 판촉사원 등에 대한 합의서”라며 “매주 행사품목 관련 협력사는 수천개여서 바이어가 직접 담당자를 만나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대형마트 관계자는 “산지 농가와 중소 제조사 등 협력사 90% 이상이 지방에 있어 매번 본사까지 와서 도장을 찍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설명했다.
백화점들은 해외 ‘노 세일’ 브랜드와 수시로 할인·기획행사를 진행하는 국내 패션브랜드의 계약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샤넬 같은 브랜드는 연간 계약서를 한 번 작성하면 끝이지만 국내 중소브랜드는 행사할 때마다 마진율과 판촉사원수 등에 대한 계약서를 써야 한다”며 “편의상 불완전 계약서를 받는 경우가 있었지만 앞으로 그런 관행을 없앨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신영/송태형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