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느린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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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였던 이탈리아 베로나에는 세계 여성들이 사랑고백 쪽지를 붙여놓는 줄리엣의 발코니가 있다. 여기서 우연히 50년 전 러브레터를 발견한 주인공 소피가 안타까운 사연에 답장을 보낸다. 며칠 후 편지 속 주인공 클레어와 그의 손자가 기적처럼 나타나 함께 클레어의 옛사랑을 찾아나선다.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2010년)의 줄거리다.
누구나 연인의 답장을 기다리며 수시로 우편함을 들춰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편지의 애잔함 덕에 편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많다. 박신양 최진실의 ‘편지’(1997)에서 불치병 환자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는 게 편지였다. 이정재 전지현의 ‘시월애’(2000년)에선 우편함에 넣으면 2년을 뛰어넘어 전달되는 편지도 있다. 일본영화 ‘러브 레터’(1995년)도 빼놓을 수 없다. 2년 전 겨울산 조난사고로 약혼자를 잃은 히로코가 약혼자의 옛 시골 주소로 편지를 부치는데 놀랍게도 답장이 온다. 편지를 계기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히로코가 눈 덮인 산에서 외치는 “오겡키데스카(잘 지내세요?)”는 긴 여운을 남긴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인 요즘이다. 손글씨의 정겨운 편지는 온라인 이메일로 대체됐다. 이제는 이메일도 느리다 해서 메신저 문자메시지 카카오톡의 세상이다. 속도만능 시대이기에 정작 느림이 주는 따뜻한 감성은 비온 뒤 풍광처럼 더욱 또렷히 각인된다.
이달 초 서울 자양동 신양초등학교에선 15년 전 교정 화단에 묻은 타임캡슐을 성인이 된 당시 학생 500여명이 모여 함께 개봉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적은 일기장 등을 꺼내본 이들에겐 더할 나위없는 추억여행이 됐을 것이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 강원도 정선에는 타임캡슐공원이 조성돼 있다. 2만원이면 1년간 타임캡슐을 대여할 수 있다. 여수엑스포 SK텔레콤관의 타임얼라이브는 느림의 감성을 느끼게 해줘 인기다. 지금 녹음한 자신의 음성을 저장했다 1년 뒤 본인 또는 누군가에게 전달해준다. 지금 쓴 편지를 미래의 지정한 날짜에 배달해주는 ‘노란 우체통’이란 전문업체도 있다.
인천공항 가는 길목의 영종대교기념관에 2009년 5월 설치된 ‘느린 우체통’에 쌓인 편지가 3년 새 5만통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편지를 넣으면 보관했다 1년 뒤 기재된 주소로 우송해준다. 우정사업본부도 올초 ‘느리게 가는 편지, 슬로레터’ 서비스를 도입했다. 느린 우체통은 북악산 팔각정, 경부고속도로 청원휴게소, 거제 해양파크 등으로 속속 확산되고 있다. 휴가길에 느린 우체통이 보인다면 자신이든 가족이든 누군가 훗날 받아볼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