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구 세광종합건설 사장 '유서 썼던 軍경험'…고난중 다시 일어설 힘 주죠

[1社 1병영 나의 병영 이야기]

1976년 25사단 포병 행정병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때 각오
'206 동우회' 지금도 끈끈한 情
“이게 누구야? 최 병장 아니야.” “서 하사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머리숱이 많이 줄었네요.(웃음)”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이름이나 직위 대신 서로를 병장과 하사로 부른다. 옆 자리에 앉은 다른 손님들이 ‘뭣 하는 사람들인가’하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개의치 않고 20대 청년으로 돌아가 그 시절 이야기를 마음껏 나눈다. 오늘은 군에서 만난 동기와 선후임들이 모이는 ‘206동우회’ 날이다. 33개월의 군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다.1976년 3월, 봄을 시기하는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나는 25보병사단에 입대했다. 신병교육을 마치고 배치받은 곳은 경기 연천군 백학면 25사단 206포병대대. 대학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작전 교육자료를 만드는 중대 작전교육계로 배치 받았다. 무거운 포탄을 나르는 포병은 아니었지만 행정병의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손글씨로 각종 작전 차트 등을 만들었는데 ‘대학 다닌 놈이 글씨를 못쓴다’며 선임병들한테 얼차려를 받기 일쑤였다. 얻은 것도 있었다. 하루 종일 손글씨를 쓰다 보니 몇 달 뒤에는 명필이 됐다. 여고생들이 쓴 위문편지에 중대원들이 모두 답장을 보내면 내� 쓴 편지에만 답장이 올 정도였다.

지금은 중견 건설사의 최고경영자(CEO)이지만 군대시절 고참들의 불합리한 지시를 따르지 않는, 돌이켜보면 꽤 골치 아픈 사병이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떳떳하지만 말이다. 대표적인 게 ‘5분 대기조’ 사건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얼차려가 이어지던 어느 날, 고참들이 저녁 점호가 끝난 뒤 후임병들에게 기합을 주기 위해 벼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고심 끝에 작전교육계에서 근무하던 점을 악용, 부대에 5분 대기조 비상벨을 발령했다. 덕분에 후임병들은 그날 얼차려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나는 산 꼭대기에 있는 대공초소로 쫓겨나 4개월간 사람 구경 못하고 혼자서 징역 아닌 징역을 살아야 했다. 206동우회 모임에서 단골로 나오는 술안주다.

하지만 사단 체육대회 등 부대를 대표하는 자리에선 늘 최선을 다했다. 당시 하계 체육대회에선 달리기 선수로 뛰고, 동계대회 땐 스케이트 선수로 출전하곤 했는데 늘 우리 대대가 포상을 받았다. 크지 않은 키로 죽어라고 내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아찔했던 기억도 있다. 1976년 8월18일,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살해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이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속한 전방부대에는 전투 진지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손톱과 발톱을 깎고 유서까지 써서 제출했다. 행정병인 나도 공용 화기인 M60을 들고 진지로 투입됐다. 당시 임진강이 넘쳐서 2박3일간 굶어가며 진지를 지키던 중 철수명령이 떨어져 복귀했다.

현실이 암담할 때마다 ‘유서까지 썼던 내가 두려울 게 무엇이냐’며 마음을 다잡게 해준 고마운 군 생활의 추억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건설회사에 입사, 1982년부터 6년여간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할 때도 진지에서 밤을 지새우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견딜 수 있었다. 군에서 만난 206동우회도 큰 수확이다. 대기업 임원부터 구청 공무원, 전국에서 제일 큰 제분 대리점을 하는 친구…. 군 시절 인연으로 사회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형제 아닌 형제처럼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건설업이 어렵다고들 한다. 나 역시 막다른 골목길에 몰려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37년 전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때도 지금처럼 암담했다. 나는 다시 구두끈을 조이고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