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네 탓'에 멍드는 사회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
비분강개와 결기가 넘쳐난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는 “소수 재벌과 특권층에 부(富)가 집중되는 재벌특권경제를 해체해 중산층과 서민이 함께 잘사는 나라로 바꾸겠다”는 ‘21세기 경제개혁 비전’을 제시했다. 심상정 통합진보당 원내대표는 “전횡적인 재벌지배구조를 개혁하는 잔 다르크가 될 것”이라고 자임했다. 남경필 민현주 등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소속 의원들은 배임·횡령죄를 지은 대기업 총수는 반드시 실형을 살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내놨다.

‘재벌원죄론’이 판치고 있다. 30대 그룹의 자산총액이 지난 10년간 3배로 늘었고, 계열사가 두 배로 증가했다는 등 ‘재벌 독식’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수뢰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기업들이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하도급 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행위를 일삼은 결과는 ‘사상 최악의 양극화’일 뿐이란다. 상대적 빈곤율, 소득 5분위배율 등 사회적 격차를 재는 지표 역시 10년 남짓한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는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이 아닌 인식이 진실?

‘21세기 마녀사냥’의 광풍이다. 살림살이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소득층,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세대들의 팍팍해진 삶을 ‘재벌 탓’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버린다. 특정한 수치, 부분적 사실을 전체의 진실로 호도하려는 정치공학자들에게 ‘사실관계를 제대로 짚어보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대기업그룹이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확장하고 자산을 늘렸다고 몰아세우는 것으로 충분할 뿐, 주력사업에 치중하는 업종특화율이 80%(10대그룹 기준) 이상으로 높아졌다는 사실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소득양극화를 재는 간판 지표인 지니계수가 야당이 집권했던 2007년의 0.295에서 2010년에는 0.288로 낮아졌다는 사실도 외면한다. 납품단가 후려치기의 대표 업종으로 거론되는 전기·전자업종의 대·중소기업 수익성(매출액 영업이익률) 격차가 2001년 15.2%에서 2005년 6.1%, 2010년에는 3.8%로까지 좁혀졌다는 사실에도 철저하게 눈을 감는다.'무지'와 억지가 판치는 세상

마케팅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 있다. “경쟁의 세계에서는 사실(fact)이 아닌 인식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요즘 정치권들의 ‘재벌 탓하기 경쟁’은 마케팅학자들의 이 ‘금언’을 떠올리게 한다. 악전고투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회적 소외계층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립과 자활의 길을 열어주는 수고로움보다, “이 모든 게 재벌 탓”이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정치 편의주의’가 무섭다.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건 ‘네 탓’의 독성이다. 어떤 상황이건 ‘내 탓’을 살피고 따지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문제의 원인을 ‘네 탓’으로 돌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고칠 일은 없고, 상대방이 책임질 일만 남는다. 그러는 동안 스스로의 영혼이 병들고, 자기노력에 의한 상황돌파 능력을 잃게 되는 건 깨닫지 못한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인식’의 포로가 돼 ‘네 탓’에 빠지는 것이라면 상황은 더 고약해진다. 유럽을 넘어 세계 전체를 동반 침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남유럽 국가의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단적인 반면교사다.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악(惡)이 있는데, 무지(無知)다. 유일한 선이 있는데, 그건 지식”이라고 했다. 타락한 정치판이 2400여년 전의 철학자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있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