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숲속에서 여름나기

돗자리 깔고 시집 뒤적이고…
잠시나마 도시 영욕서 벗어나
사색 통한 삶의 지혜 깨닫길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
여름은 생명들이 번창하는 계절이자 아울러 폭염으로 심신이 지칠 수 있는 계절이다. 도시에 있건 시골에 있건 무더위를 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심신이 지치면 의욕을 잃을 뿐만 아니라 밥맛을 잃는 것도 예사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여름을 즐기는 데 벗들이 필요하다. 내가 찾은 벗들은 당시전집(唐詩全集), 숲, 죽부인, 부채, 수박, 얼음 넣은 홍차, 매미소리, 붉은 포도주 따위다. 숲속에서 당시전집을 뒤적이며 한나절 지내기, 수박을 깨먹고 차가운 홍차를 즐기며 더위를 식히기, 해질녘 붉은 포도주를 마시기, 죽부인 끌어안고 잠자기…. 이것들로 인해 여름은 한결 여유롭고 풍요로워진다.

가끔 돗자리와 당시전집을 옆구리에 끼고 녹음이 짙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매미 울음소리가 쩡쩡 울리는 숲속은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저 바깥보다 온도가 몇 도는 더 낮다. 울울창창한 숲속의 오후는 매미 소리로 한결 생기를 얻는다. 바람이 잘 드나드는 명당자리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당시전집을 뒤적인다. 그 한가로움이 뼛속에 사무칠 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깃들기도 한다. 온갖 욕망과 성공에의 꿈, 열띤 경쟁으로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문득 격절된 숲속에서 당시전집이나 뒤적이는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하게 여겨진다. 세상은 앞서 가는데, 나만 뒤처진 것은 아닌가! 한가로움이 와락 초조함으로 바뀌는 찰나다. 낙오자의 열패감이 의식을 옥죄고 두려움이 덮친다. 허나 근심은 잠시뿐이다. 양(量)의 유혹과 중독에서 벗어나 보자면, 자발적 가난이란 오히려 낭비를 정화하는 삶의 방식이 아닐까? 가난하니 숲속에서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와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내 경험에 비춰보자면, 사람은 숲에 있을 때 사색인으로 변신한다. 숲은 삶에 대한 드물게 진지한 사색이 이뤄지는 장소다. 토머스 칼라일의 사색도 숲속에서 이뤄진 것은 아닐까? 그는 두 종류의 사람을 존경한다고 썼다. 첫째, 흙으로 만든 도구로 땅을 일구고 그것을 인간의 것으로 만드는 늙은 사람들. 그들의 거친 손에는 노동의 미덕과 고귀함이 서려 있다. 둘째, 고결한 영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일용할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위해 애쓰는 사람. 사람은 노동으로 먹고 사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 필요를 구한다. 노동은 삶을 유지하는 한 방편이지만, 그것에서 의미, 형상, 가치로 바꿀 수 있는 내적 동력을 찾지 못한다면 노동은 비천한 고역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을 삶의 의미, 형상, 가치로 바꾸는 게 문화의 동력이고 예술의 위대함이다. 우리가 시집을 읽고, 음악을 듣고, 철학을 공부하고, 종교를 구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사람이 예술·종교·철학에 심취하는 것은 무지나 무감각, 인습과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삶을 깊이 보고 통찰하는 지혜를 얻고 보다 높은 인간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스물여덟 살 난 청년이 숲속으로 들어가 2년 하고도 두 달을 혼자 살았다. 그 뒤 호숫가 숲속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가는 얘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 그 책이다. 소로는 “내가 숲으로 간 까닭은 의식적인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고, 오로지 삶의 본질적인 것들만 대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것들이 가르치는 것을 배울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죽을 때가 됐을 때 삶을 헛되이 보낸 것을 발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적었다.

소로가 숲속 생활에서 잃은 것은 편리한 생활과 세속에서의 영화(榮華)요, 얻은 것은 자연 속에서 사는 단순한 삶의 즐거움, 그리고 숙고하며 사는 삶의 지혜다. 사람마다 취향이나 가치관이 다르니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가 하는 판단은 다를 테다. 나는 숲속 생활에서 진정한 삶의 정수(精髓)를 경험했다는 소로의 선택을 지지하고 그의 사유를 따른다. 무덥다고 이 여름을 빈둥거리며 지낼 수는 없다. 올 여름엔 숲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숲에서 더위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삶에 대해서 깊이 있는 사색을 해보자.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