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사이코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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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정보기관 OSS는 정신분석학자 월터 랑거 박사에게 히틀러의 심리 파악을 의뢰했다.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면서도 달빛을 두려워하고, 아이처럼 새끼손가락을 빠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여성과 교합을 하면서 방을 기어다니는 야릇한 버릇도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심리적 프로파일러’라는 제목이 붙은 랑거 박사의 보고서는 히틀러가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사이코패스’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이코패스는 겉은 멀쩡하지만 무슨 계기가 생기면 동정심 없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다. 1920년대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한 독일 심리학자 슈나이더는 광신, 자기현시, 의지력 결여, 폭력적 성격 등 10가지를 특징으로 꼽았다.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 정신의학연구소의 나이겔 블랙우드 박사는 지난 5월 사이코패스의 뇌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전문측 전두피질과 측두극의 회색질이 적은 탓에 범죄를 저지를 때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유전적 원인과 뇌손상, 약물 노출, 가정환경 등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상을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누가 사이코패스인지 도무지 눈치챌 수 없다는 점이다. 일본 게이오대 니시무라 박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뜻에서 ‘정장 차림의 뱀’이라 불렀다. 1970년대 미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도 ‘귀공자’로 불릴 만큼 잘생긴 데다 달변이어서 피해자가 많았다. 100여명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번디는 35명 살해만 인정했다.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여성에게 책을 옮겨달라고 부탁한 뒤 둔기로 머리를 때려 납치하는 등 교활한 수법을 썼다.
제주 올레길을 여행하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용의자도 사이코패스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피해자의 신체 일부를 잘라 범행 장소에서 18㎞ 떨어진 곳에 버리는 등 엽기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통영 초등학생 살해범도 범행 후 ‘목격자’로 버젓이 방송 인터뷰까지 했다. 유영철 강호순 오원춘 등이 저지른 범행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터라 충격이 더 크다.
사이코패스는 미국 인구의 1%, 연방교도소 남성 수감자의 25%나 된다고 한다. 우리도 한림대와 경기대 연구진이 전과 있는 강력범 450명을 조사해보니 25%가 사이코패스로 나왔다. 사이코패스의 재범률은 80%에 이르지만 이들을 격리할 대책은 없다. 겉으론 표시가 나지 않으니 예방도 어렵다. 이러다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보다 ‘네 이웃을 조심하라’는 교육을 먼저 시켜야 할 판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