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순환출자 전면금지를 주장하려면…

기업지배구조 나라마다 다른 법
순환출자 문제 삼는 나라 없어
출자고리 형성 배경부터 살펴야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TV나 라디오의 토론 프로그램을 듣다보면 짜증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기기는 기본이다. 검증되지 않은 내용도 사실인 양 떠들고, 불리한 팩트는 깔아뭉갠다. 한 재벌개혁 관련 토론 프로그램에서다.

“발렌베리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가 넘지만 존경받는 기업이지요. 우선 출자구조가 삼성처럼 복잡하질 않아요. 차등의결권주가 있기는 하지만… 순환출자로 모든 자회사들이 묶여있지 않지요.…”목소리를 높이던 이 출연자, “차등의결권주가 있기는 하지만…”이라는 부분은 들릴락 말락 얼버무렸다. 시청자들은 차등의결권제도를 기억에 담아놓지 않았을 것이고, 순환출자를 반드시 금지시켜야 할 사회악으로 규정한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과연 차등의결권제도가 그 정도로 흘려버릴 수 있는 제도인지.

차등의결권이란 지배주주에게 보통주의 몇 배에 이르는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출연자가 사례로 든 스웨덴의 발렌베리라는 가문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에 22%만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46%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공개기업인데도 그렇다. 우린 꿈도 못 꾸는 제도다. 한때 1주당 1000주까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니, 스웨덴 최대 재벌 발렌베리에는 순환출자를 전면금지하면 자칫 외국 기업사냥꾼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한국 기업들의 걱정 같은 것은 애초 없었던 셈이다. 재벌비판론자들이 추앙하는 미국의 워런 버핏도 지주회사인 벅셔해서웨이의 경영권을 차등의결권으로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다. 그런데도 차등의결권제도를 얼버무리며 국내 기업을 비난한 이 학자의 속셈은 무엇일까.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모든 재벌의 구조를 발렌베리처럼 지주회사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것도 이들의 주장이다. 발렌베리가 지주회사로 간 것은 그 나라의 독특한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스웨덴 정부가 1916년 금산분리를 강화하자 SEB라는 은행을 통해 자회사를 지배하던 발렌베리는 갖고 있던 주식을 옮길 곳이 있어야 했다. 그게 인베스터라는 지주사다. 하지만 금산분리에도 은행 SEB는 여전히 인베스터의 핵심 자회사로 남아 있다. 은행이 일반 지주사의 자회사가 될 수 있고, 지주사라고 해도 차등의결권 덕분에 소수의 지분만으로 자회사를 지배할 수 있다. 우리 제도도 이랬다면 순환출자는 애초 없었을 수도 있다.불법·편법 상속을 막기 위해서라도 순환출자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불법·편법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그런 주장을 펴려면 지금의 세제가 대기업 상속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최고 65%나 되는 세계 최고율의 상속세를 내면서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대기업 대주주가 몇 명이나 될까.

발렌베리처럼 상속 대신 모든 주식을 공익재단에 기부한 뒤 재단을 통해 간접경영하면 좋지 않느냐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발렌베리도 그것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사민당 정권이 1910년 세계 최초로 부유세를 만들어 압박해오자, 버티다 못한 부자들은 해외로 탈출했고 발렌베리는 경영권을 보전하기 위해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방식을 택했다. 스웨덴의 부유세는 2000조원의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급기야 세계 최고 갑부인 이케아의 잉마르 캄프라드마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해외로 빼냈다. 스웨덴이 2007년 부유세를 폐지한 이유다.

우리는 공익재단에 보유 주식을 기부하려고 해도 여의치 않다. 기부하는 주식이 지배지분의 5%가 넘으면 무조건 증여세를 내야 한다. 경영권이 온전할 리 없다. 미국 같은 나라는 공익재단에 주식을 기부해도 증여세를 한 푼도 물지 않는다.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가 경영권을 유지하면서도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재산을 모두 재단으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라.나라마다 역사와 환경이 다르다. 기업 구조도 그렇다. 일본의 도요타, 독일의 도이치은행도 순환출자 기업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됐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다. 해외 기업과 힘든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들이다. 순환출자 전면금지를 주장하기 앞서 대기업들이 왜 복잡한 순환출자의 고리에 얽혀 있는지, 그 배경부터 살펴볼 일이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