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한 양적완화 '금단의 처방' 꺼내나

유로존, ESM에 은행면허 부여 추진

ECB서 돈 빌려 위기국 국채 매입
佛·伊, 인플레 거부감 심한 獨 설득 나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이 ‘금단(禁斷)의 처방’으로 불리는 무제한 양적완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음달 출범할 5000억유로 규모 유로안정화기구(ESM)에 은행 면허를 부여하는 방안이 위기 해결의 처방으로 떠오른 것.

ESM이 은행 기능을 갖게 될 경우 유럽중앙은행(ECB)에서 무제한으로 자금을 빌릴 수 있게 된다. ECB가 찍어내는 돈으로 ESM이라는 ‘위기 방화벽’ 규모를 키워 재정위기국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정위기국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ECB가 직접 사들이는 ‘부채의 화폐화’가 금지돼 있기 때문에 ECB가 ESM을 통해 위기국 국채를 사들이는 방식이다.◆고개 내미는 ‘인플레이션 처방’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달 31일 프랑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유로존 재정위기의 터널 끝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발표한 공동선언문에선 “유로존을 구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다하겠다”고 언급했다. 지난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모든 준비가 다 돼 있다”는 발언을 재확인한 것이다. 시장의 관심은 2일 ECB와 영국중앙은행(BoE) 통화정책회의,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앞두고 유럽 지도자들이 말하는 ‘모든 조치’에 모아지고 있다. ECB의 유로존 국채 매입 재개뿐 아니라 그 이상의 조치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ESM에 은행 면허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독일이 빠른 시일 내에 태도를 바꿀 것을 촉구한 것”으로 발언을 해석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ECB가 ESM을 앞세워 유로존 국채 매입을 ‘본격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정위기국이 국채를 발행하면 ECB의 발권력을 동원해 발행물량을 사주는 부채의 화폐화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올랑드 대통령은 대선기간 중 “ECB가 국채의 화폐화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정상도 지난 6월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화폐화’ 문제를 거론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현재의 재정위기에 ‘인플레이션 처방’이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ECB의 국채 매입 결과 시중에 돈이 풀려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재정위기국이 지고 있는 빚의 실질 규모도 줄고 고정금리로 표시된 국채 상환 부담도 크게 완화된다”고 주장했다. ‘ECB에서 그동안 생각할 수 없었던 처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게 외신들의 반응이다.

실질적으로 돈을 마구 찍어내는 효과가 있는 부채의 화폐화 조치는 1차 대전 이후 독일과 2차 대전 중 미국에서 시행됐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부작용 탓에 각국의 정책 옵션에서 사라졌다. ◆獨 ‘생각 못한 처방’ 동의할까

돈을 풀어 재정위기국 국채를 사는 것을 상시화·대규모화하자는 주장에 독일은 일단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1920년대 1달러가 42억마르크에 이를 정도로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했던 독일에선 물가 상승을 유발하는 정책이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 재무부와 연정 참여당인 자유민주당(FDP)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분데스방크 관계자도 CNBC와의 인터뷰에서 “ECB는 주된 정책목표인 물가 안정을 유지하는 데 엄격하게 집중해야 한다”고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독일 언론들도 반대했다. 주간 슈피겔은 “무제한으로 돈을 풀어 재정위기국 국채를 사자는 것은 ‘위험한 꿈’에 불과하다”고 반발했다. 일간 디벨트는 “화폐화 주장은 ESM 규정 위반일 뿐 아니라 후유증이 너무 큰 조치”라고 비판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