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 "단 한명 때문에"…유로존 국채 매입, 獨에 발목 잡혔다

'양치기 소년'된 ECB 총재

"돈 풀면 인플레 우려"…반대표 던져
무제한 국채 매입 등 파격 조치 무산
“단 한 명(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이 유럽중앙은행(ECB)의 국채매입에 반대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독일이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드라기 총재는 2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ECB 정례 통화정책위원회를 마친 뒤 재정위기국 국채매입을 재개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매입 시기나 규모 등 구체적인 내용은 내놓지 못했다. 독일의 반대 탓이다. ECB의 발권력 동원, 무제한 국채매입 등 파격적인 조치를 기대했던 시장은 발표 직후 급락세로 돌아섰다. ECB가 “신뢰를 잃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ECB는 이날 기준금리를 연 0.75%로 동결했다.◆국채 사들여도 제한적일 듯

독일의 반대는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다. ECB에서 가장 많은 지분(28%)을 갖고 있는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의 바이트만 총재는 이날 통화정책위원회를 앞두고 “ECB는 물가안정이라는 본연의 업무를 벗어나 월권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독일은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며 국채매입을 반대해왔다.

드라기 총재는 국채매입을 재개하더라도 상당히 제한적으로 시행될 것임을 내비쳤다. 유로안정화기구(ESM)에 은행 면허를 부여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 소관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ESM이 ECB 돈을 쓸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다. 오는 9월 출범할 예정인 ESM의 가용금액 5000억유로로는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위기국가의 재정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ECB의 국채매입 규모를 묻는 질문에는 “국채매입이 제한적일지 무제한적일지는 모른다”면서도 “엄격한 통화정책 안에서만 이뤄질 것”이라고 답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올해 국채만기 도래액은 각각 620억유로, 1524억유로에 이른다. ECB가 발권력을 동원하지 않을 경우 국채매입에 쓸 수 있는 돈은 800억유로 정도밖에 없어 재원이 부족한 상태다.

◆“ECB 못 믿겠다”

시장이 이번 회의에 건 기대는 어느 때보다 컸다. 지난 6월29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재정위기 탈출을 위해 ESM의 은행 직접 지원 등이 합의됐지만 구체적인 시행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스페인 은행권에 대한 구제금융도 시장 기대치를 밑도는 1000억유로에 그쳤다. 결국 스페인 국채금리는 지난달 24일 연 7.5% 수준까지 치솟아 스페인이 국가 차원의 전면 구제금융에 돌입할 수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결국 드라기 총재가 지난달 26일 직접 나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하겠다”며 진화에 나섰고, 이후 유럽증시는 기대감을 안고 꾸준히 상승해왔다.하지만 결국 구체적인 조치 없이 회의가 끝나자 시장은 “더 이상 ECB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피터 딕슨 코메르츠뱅크 이코노미스트는 “기대가 너무 컸고 그만큼 실망도 컸다”고 지적했다. 드라기 총재는 양치기 소년이 된 셈이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