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징벌적 세제개편

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
정부가 내년 세제개편안을 확정해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한다. 이미 당정협의 과정에서 드러났던 대로 고소득자·대기업 증세로 세수를 늘린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최저한세율 인상, 고소득자에 부과되는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인하, 주식양도차익 과세 대상인 대주주 범위 확대 등을 합의했다고 발표했던 때부터 예고됐던 바다.

정부가 틈만 나면 목소리를 높였던 비과세·감면 폐지는 이번에도 별게 없을 모양이다. 올해 일몰을 맞는 장기주택마련저축을 없애면서 동시에 비과세 재형저축을 부활시키고, 소득공제 혜택을 주는 장기펀드를 새로 만드는 식이니 그렇다. 전체 감면액이 30조원에 가까운 비과세는 못 줄이면서 세수가 부족하다며 부자증세를 하겠다니 이런 코미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된다는 정치논리에 임기말 정부가 농락당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부자·대기업 증세로 세수 확대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당장 38%의 세율이 부과되는 소득세 최고 과표구간을 조정해 증세하자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쏟아진다. 정부는 손대지 않겠다는 방침이지만, 새누리당은 이 구간의 하한선을 3억원에서 2억원으로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다. 마침 민주당이 엊그제 1억5000만원으로 확 내리겠다고 발표했으니 새누리당의 목소리가 더 커질 게 뻔하다. 법인세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법인세를 최고 25%로 올리자고 하는 마당이다. 새누리당도 부자정당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요량에 뭔가 내놓으려들 가능성이 짙다. 이른바 경제민주화 실천모임부터 가만 있지 않을 게 틀림없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최악의 세제개편이 이뤄질 것이란 걱정이 벌써부터 나온다.

그렇다고 정부를 면책할 수는 없다. 정치권이 문제지만 정부도 정작 필요한 세제 선진화는 손도 대지 않았다. 성직자 과세, 자본이득과세만 해도 그렇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진작에 과세의 필요성을 인정했건만, 내년 정부안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조차 제시하지 않고 있다. 부부합산과세 같은 논쟁적 과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근로자가구 소득 격차에는 부부가 맞벌이냐 외벌이냐가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게 현실이다. 부동산 양도차익 과세에서 보듯 가구를 기준으로 한 과세방식이 새로울 것도 없다. 다만 헌법재판소가 위헌 소지가 있다고 결정한 것을 구실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차기 정부가 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정치적으로 득될 게 없으니 건드리지 말고 가만 있는 게 상책이라는 정무적 판단이 작동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징벌적 세금은 약탈이다

과세의 원칙과 철학이 문제다. 정부가 당장 발등의 불을 끄고 보자는 심산에 정치권의 부자증세를 수용한 결과 이번 같은 세제개편안이 만들어졌다. 전체 국민의 주머니를 털 수 없으니 부자와 기업만 두드리자는 꼼수다.

그렇지 않아도 소득세와 법인세는 기형적인 구조다. 근로소득세의 경우 근로자의 11.9%가 전체 세금의 81.6%를 부담하지만,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근로자가 40%를 넘는다(2009년 기준). 법인세는 더욱 그렇다. 2010년 납세실적을 보면 상위 1% 기업이 79%의 세금을 내고, 상위 10%가 94%를 부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증세는 곧 형벌이요, 약탈일 뿐이다. 국민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세금을 99 대 1로 쪼개 소수를 핍박하려는 징벌적 세금이다. 경제민주화 구호에 세정이 무너져가는 모습이다. 박재완 장관부터 포퓰리즘에 굴복하지 마라.

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