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500년 해상무역 지배한 베네치아, 지도자·뱃사공도 '뼛속까지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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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소금 외에는 생산품 없는 불모의 땅, 대외교역만이 희망
누구와도,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다는 상인정신으로 무장
바다의 보세창고이자 현금으로 이루어진 제국
부의 도시, 베네치아
로저 크롤리 지음 /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560쪽 / 2만6000원
‘베네치아에서는 모두가 상인이다.’
14세기 중엽 한 피렌체 사람은 베네치아 여행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베네치아 사정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었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지도자인 ‘도제’는 물론 예술가, 성직자까지 상업 거래에 뛰어들었다. 현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상인들의 사업에 투자했다. 갤리선의 노잡이까지도 외국 항구에 가서 팔 상품을 갖고 다녔다.베네치아가 14~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500여년간 동부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한 비결은 무엇일까. 영국의 역사 저술가 로저 크롤리는 《부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베네치아인들 스스로가 ‘바다 나라’라고 부르던 해양 제국의 부흥과 그들이 창출한 상업적 부(富)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중부 유럽과 동부 지중해 지역을 잇는 해양고속도로, 아드리아해의 북쪽 끝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 저지대의 석호로 이뤄진 베네치아는 가망이 없는 곳이었다. 베네치아는 항구 도시가 아니어서 거친 파도에 취약했다. 석호의 물고기와 염전에서 나는 소금 외에 생산되는 게 없었다. 밀이나 육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토지가 없으니 봉건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베네치아의 유일한 희망은 바다를 통한 대외 교역이었다. 스스로 도덕관념이 없는 교역정신, 즉 어느 누구와도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장해야 했다. 살기 힘든 환경에서 모두 똘똘 뭉쳤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1080년대 베네치아는 노르만족으로부터 비잔틴 제국을 방어하면서 결정적인 보상을 얻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에서 세금도 내지 않고 자유로이 교역할 자유를 얻은 것. 이후 베네치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몰려들었고, 동부 해안에 상업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4차 십자군 원정이 터닝 포인트였다. 베네치아는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선박 등을 준비하기로 하면서 잇속을 챙겼다. ‘50척의 무장 갤리선을 무상으로 추가 공급하면서 영토의 형태든 금전의 형태든, 육로를 통하든 바다를 통하든 우리가 정복하는 것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조항을 끼워넣었던 것. 뼛속까지 배인 상인 정신으로 중세 최대의 상업 계약을 맺은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 성공하면 베네치아는 동부 지중해 교역을 일거에 장악할 터였다. 세금 없는 독점 무역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자비로 갤리선 50척을 대야 하는 리스크보다 얻을 수 있는 잠재 수익이 훨씬 컸다.
4차 십자군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해체될 위기에 처한 것도 베네치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십자군 준비 자금에 대한 채무 유예를 조건으로 아드리아해 건너편 달마티아 해안의 도시 자라를 공격할 기회를 잡게 된 것.
1204년 비잔틴 제국이 분할되면서 베네치아는 하룻밤 새 해양제국의 상속자가 됐다. 아드리아해 꼭대기에서 에게해까지 세를 뻗치며 상업국가에서 식민지 강대국으로 변한 것. 동부지중해 통제권을 확보했고, 무엇보다 상업적 부의 시금석인 콘스탄티노플의 8분의 3에 해당하는 지역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봉건영주들이 그리스의 척박한 땅에 작은 봉건영지를 세우는 데 만족한 것과 달리 베네치아인들은 항구와 교역소, 항로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해군기지를 요구했다. 바닷길 통제가 곧 부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저자는 “베네치아는 어떤 면에서는 최초의 ‘가상도시’였다”고 말한다. “놀라울 만큼 현대적인 바다에 있는 보세창고였으며 현금으로 이루어진 제국”이었다고 말한다. 또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적인 목표에 맞춰진 정부 정책을 보유한 세계 유일의 나라였다”며 “네덜란드와 영국에 작은 해양 국가가 글로벌한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한 특유의 모델을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