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콘디 라이스 전 美 국무장관 "DJ는 이상주의자…노무현은 속을 알 수 없었죠"

8년간의 워싱턴 시절 담아…한반도 지도자 평가 눈길
9·11 테러, 이라크 전쟁 등 사태 전개·처리 과정 생생

최고의 영예
콘돌리자 라이스 지음 / 정윤미 옮김 / 진성북스 / 980쪽 / 2만5000원
“유난히 길고 힘들었던 이틀이 지나갔다. 2001년 9월13일 아침, 나는 욕실 거울 앞에 말없이 한참 서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우리가 혹시 놓친 것이 있었나?’ 정신을 차리자. 일단 오늘 하루를 버텨야 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자. 지금은 혼란스럽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이해될 거야. 지금은 할 일에 집중하자.’ 2004년 4월. 9·11위원회에서 증언할 때 비로소 모든 사건이 머릿속에 정리되는 것 같았다.”

천하의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도 9·11 테러에 직면해서는 상황 파악이 늦었던 것 같다. 수행 비서인 토니 크로퍼드 육군 사령관이 비행기 한 대가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다고 보고했을 때의 첫 반응이 “별일이 다 있군”이었다. 전화로 연결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첫마디도 “정말 이상한 사건”이었다.

업무회의를 하려고 내려간 상황실에서 또 다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다는 메모를 전달받았을 때까지도 그랬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일이 생겨서 먼저 가겠다”고 말한 뒤 상황실을 빠져나왔다. 테러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뼛속까지 부들부들 떨었다고 했지만 말이다.

2001년부터 만 8년간 집권한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보좌관,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58)의 회고록 《최고의 영예》는 그의 백악관 시절 8년간의 일기다. ‘최연소, 첫 여성, 첫 흑인’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그가 부시 행정부에서 어려운 직책을 맡아 보여준 행보는 놀라웠다. 그는 세계를 뒤흔든 사건 사고의 한가운데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몸으로 풀어냈다.책은 현대사의 모퉁이마다 불거졌던 사건의 전개와 처리 과정을 그의 눈에 비친 날것 그대로 펼쳐 보인다. 백악관 입성 9개월 만에 맞닥뜨린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전쟁, 북핵을 둘러싼 마찰 등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벌어진 외교전과 베일 속에 가려진 뒷얘기를 풀어낸다. 급박한 상황마다 백악관과 국무부가 크고작은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생생하다.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푸틴과 카다피, 무바라크 등 각국 정상과 얽힌 일화도 털어놓는다.

한반도 지도자들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눈에 띈다. 그는 2001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며 민주화 운동 경력을 소개한 뒤 “부드러운 태도의 노 정객인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 체제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김 전 대통령은 북한에 도전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술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해서는 “좀처럼 심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반미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적었다.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만난 부시와의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에서 ‘종전선언’ 발언 요청을 한 노 대통령을 떠올리며 ‘이상한 성격’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란 독설을 쏟아냈다.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 원수에 얽힌 얘기도 눈길을 끈다. 그는 리비아와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던 2008년 트리폴리를 방문했다. 당시 카다피는 저녁식사 후 그를 위해 ‘아프리카 공주’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만들었다고 해 당황했는데 나중에 비디오를 본 뒤 “괴상하지만 최소한 외설적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카다피는 2007년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그를 ‘나의 아프리카인 여왕’이라고 부르며 “그를 많이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의 12월 대통령 선거, 종잡을 수 없는 김정은의 북한, 섬을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동북아 정세와 관련한 무언의 조언을 얻을 수 있겠다. 투철한 역사의식과 시대 흐름을 꿰뚫는 매의 눈,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기상,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조정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