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시인 백석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일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다. 반면 시인들 중엔 백석(1912~1996)을 꼽는 이들이 많다. 고향인 평북 정주의 투박한 사투리로 토착 정서를 노래하면서도 모던한 감각을 살려낸 시가 영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6년 1월 백석이 낸 시집《사슴》에 대해 김기림은 “신년 시단에 한 개의 포탄을 내던졌다”고 했다. 신경림은 6·25 직후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찾아내고서 “실린 시는 40편이 못 됐지만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 더한 것이었다. 읽고 또 읽었다”고 털어놨다.

당대의 미남으로 통했던 백석은 연애도 잘했다. 나중에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 된 자야(본명 김영한)와의 사랑은 드라마처럼 애틋하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자야가 곧 나타샤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녀는 1995년 ‘내사랑 백석’이란 책을 내고, 백석 문학상도 제정했다. 1997년 1000억원에 이르는 대원각 땅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을 때 주위에서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자야와 헤어진 후 만주를 방랑하던 무렵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흰 바람벽에/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흰 바람벽이 있어’) 낯선 땅 적막한 방에 홀로 앉아 늙은 어머니와 사랑했던 여인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그리움에 젖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영어·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하다 분단과 함께 북에 남으면서 우리 문학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한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지만 당성(黨性)이 약하다는 이유로 양강도 협동농장으로 쫓겨나 양치기를 하다가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은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에야 다시 읽히기 시작한다. 그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만 수백 편에 이를 정도로 시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의 시가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와 통인화랑에서 18일까지 열리는 문학그림전을 통해서다. 중견화가 10여명이 그의 시 세계와 삶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출중한 재능과 미끈한 용모로 뭇 여성들을 사로잡던 백석이 노년에 오지 협동농장의 양치기로 생을 접은 건 비극이다. 우리가 헤쳐 나와야 했던 역사의 굴곡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제 그는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영원한 자유인이 돼 나타샤와 함께 웃고 있을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